풀카운트
저택의 응접실처럼 생긴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시계 앞에는 하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다. 무대 오른편에는 소파가 두 개 있고 거기에 주인공 남자가 서 있다. 관객들은 극의 도입부에서 남자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들으면서 남자가 가진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남자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 남자는 빈털터리 사기꾼이다.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저택도, 모자도, 넥타이도 모두 잠깐 빌린 것이다. 남자는 모든 걸 빌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하인은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인은 남자에게 빌려준 것들을 인정사정없이 빼앗아 간다, 심지어는 호주머니에 있던 하찮은 소지품들까지도. 처음에는 번듯하게 차려입은 것처럼 보였던 주인공 남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빈털터리가 되어간다. 결국 모든 걸 빼앗긴 그에게 남은 건 ‘덤’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뿐.
출국이 2주 앞으로 다가 온 우리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휑해졌다. 침대가 사라졌고, TV가 사라졌고, 책상이 사라졌고, 소파가 사라졌다. 그리고 시에나가 사라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냄비와 그릇들이 사라졌고, 옷들이 사라졌고, 누리가 만든 레고가 집에서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라는 하인은 끊임없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일 년 동안 모아 놓은 집안 곳곳의 세간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갔다. 하인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가족에게 나타났다. 때로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아담한 키에 반짝이는 백발을 한 윗집 할머니의 모습으로, 때로는 롱아일랜드에 정착한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사업체 직원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빌려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다. 우리 집은 일 년 전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점점 비슷해졌다, 빌려 온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그 남자처럼.
롱아일랜드에 도착한 초기에는 물건을 사는 것이 큰일이었는데,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물건을 처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큰일이었다. 굳이 따지면 후자가 좀 더 난이도가 높았다. 왜냐하면 필요한 물건을 못 사면 안 쓰면 그만이지만 물건을 처분하는 것은 버리든 기부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기한 내에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물건을 사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정보는 많았지만 떠날 때 어떤 방법으로 팔거나 처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우주의 마지막 경기를 앞둔 즈음에 한 가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물건을 처분했다. 처분하지 못한 바로 그 한 가지는 이케아에서 구입한 아이들 침대였다. 무상으로 넘기겠다고 한인 사이트에 올린 지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물건을 가져갈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포기하고 어떻게 버려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메시지를 받았다.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유학생인데 침대를 가져가고 싶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차로 전달해 주고 싶었지만 시에나를 팔았기 때문에 침대를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본인이 학생이어서 평일에는 수업 때문에 어렵고 일요일만 가능하다고 했다. 우주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다음 날, 그에게 우리 집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가구인 침대를 넘기기로 했다.
10월 5일. 드디어 마지막 경기다. 우리의 상대는 베이쇼 머로더스. 여름리그에서 단 1패만을 했던 여름리그 최강의 팀이면서 가을리그의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우주가 속해 있던 여름 리그 팀 하프할로우힐 아메리칸스는 이 팀에게 3:22, 4회 콜드게임 패를 당했다. 우주와 함께 머로더스와 컨텐더스가 하는 경기를 봤는데 여름리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야구를 했다. 위협적인 타자나 뛰어난 투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팀원들 모두가 기본기에 충실했다. 투수들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알았고, 타자들은 선구안을 발휘해 투수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주자들은 호시탐탐 도루를 시도했고, 야수들은 기본적인 포구와 송구에 충실했다. 우주는 이 팀이 여름리그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이 팀을 꼭 이기고 싶어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콜드게임 패의 수모를 갚아 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썬더스 전과는 또 다른 의미의 설욕전.
우주는 선발투수 5번 타자로 출전했다. 1회 초 우리 팀 타자들은 모두 범타로 물러났다. 상대 투수는 이전에 여름리그 경기 때도 우리 팀과 경기할 때 선발로 나왔는데 스피드는 빠르지는 않지만 제구가 잘 되었고 완급조절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잘 빼앗았다.
1회 말 우주는 볼넷을 하나 내줬지만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2회에도 우리 팀 타자들은 점수를 뽑지 못했다. 우주는 두 번째 타자로 나와서 3루 땅볼로 아웃됐다. 2회 말 우주는 볼넷과 안타로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다. 우주의 투구 동작이 오래 걸리는 것을 간파한 상대팀 주자들은 루상에 나가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2루와 3루를 노렸다. 무사 2, 3루에서 우주는 적시타를 맞고 두 점을 내줬다. 0:2. 상대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파고들 줄 알았다. 강팀다웠다.
3회 초에 우리 팀 타자들은 연속 볼넷으로 출루했지만 후속타 불발로 점수를 내지 못했다. 3회 말 우주는 마운드 위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서 하던 동작들을 없애거나 줄였다. 우주의 공은 이전 이닝보다 좀 더 위력적이었고 상대 타자들은 좀처럼 공을 맞추지 못했다. 추가 실점 없이 3회를 마쳤다. 0:2.
4회 초. 우리 팀은 1번 로건으로 시작해서 중심타선으로 연결되는 좋은 타순이었다. 첫 번째 타자인 로건은 볼넷으로 걸어 나갔고, 도루로 2루를 훔쳤다. 다음 타자는 토코. 볼, 볼, 스트라이크. 네 번째 공을 받아쳤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무사 1, 3루. 타순이 한 번 돌고 나니 타이밍을 맞추기 시작했다.
존과 프리다가 연속 안타를 쳤고, 로건과 토코가 모두 홈으로 들어왔다. 2:2. 무사 1, 2루. 우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파울, 파울, 파울. 우주는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불리한 카운트에서 침착하게 두 개의 공을 커트해냈다. 여섯 번째 공을 던졌다. 우주가 친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졌고 2루에 있던 존은 전력질주로 홈에 들어왔다. 3:2. 드디어 역전. 하지만 후속타 불발로 추가점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4회 부터는 앤드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앤드류는 4회와 5회를 실점 없이 잘 막았다. 6회 초 우리 팀은 두 점을 더 냈다. 5:2.
6회 말 앤드류의 구위가 이전 이닝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다. 앤드류는 체력이 떨어지면 공의 위력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처음 두 타자는 연속 볼넷. 주자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투수와 내야진들을 괴롭혔다. 피카렐라는 마운드로 올라가서 앤드류에게 3점을 앞서고 있으므로 불필요한 견제를 하지 말고 타자와 승부하는데 집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볼, 볼. 상대 팀은 더블 스틸을 시도했고 무사 2, 3루가 되었다. 세 번째 공을 상대 타자가 받아 쳤지만 2루수 정면이었다. 하지만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득점. 5:3. 1사 3루. 다음 타자는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하지만 3루 주자가 태그 업으로 홈에 들어왔다. 5:4. 한 점 차까지 따라 왔다. 앤드류는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끝났다. 5:4.
여름리그 우승팀이면서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인 머로더스를 잡았다. 우주는 마운드에서 3이닝 동안 두 점만을 내줬고 타석에서는 2타수 1안타, 승리타점을 기록했다. 마린스의 다른 아이들에겐 아직 몇 경기가 더 남았지만 우주에게 주어진 경기는 모두 끝났다.
야구팀의 부모들과 아이들이 우주를 위한 송별파티를 해주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들은 배팅케이지에서 타격 연습 순서를 우주에게 양보했고, 경기가 끝나자 모두 우주에게 말을 걸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전까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아이들도 모두. 봄부터 가을까지 같은 팀이었지만 늘 서먹서먹했던 코너도 활짝 웃으면서 우주에게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아이들은 우주에게 봄 리그에서 우승했던 옷세고 파크의 흙을 담아 가라고 권했다. 우주는 봄 리그를 우승했던 경기장 마운드의 붉은 흙을 조금 퍼서 지퍼락 비닐백에 담았다. 아이들이 모여서 우주를 헹가래를 쳐 주었다. 우주가 보기보다 무거워서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누리는 다른 아이들이 우주를 헹가래 치자 자신도 덩달아 신이 나서 디아즈의 동생 조슈아와 함께 야구장 내야를 전속력으로 뛰어 다녔다. 존의 엄마 크리스틴은 팀원들이 우주에게 전하는 인사말을 한 줄씩 작게 써넣은 커다란, 방문 두 개 크기 정도 되는, 플랜카드를 우주에게 선물했다. 플랜카드에는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을 만큼 크게 ‘GOOD BYE WOOJU’ 라고 쓰여 있었다. 우주는 웃을 듯 말 듯 한, 아니면 울 듯 말 듯 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옷세고 파크에서의 마지막 가을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침대를 가져가겠다는 학생이 집에 들렀다. 뉴욕에서 요리 학교를 다닌다는 그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키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였고, 머리는 스포츠머리로 짧게 잘랐다. 깃 없는 베이지색 티와 면바지 차림이었다. 세련된 뉴요커라기보다는 오히려 외박 나온 군인 같은 행색이었다. 그는 침대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면서 공짜로 가져가는 것이 미안했던지 대화하는 동안 멋쩍은 웃음을 몇 번 지었다.
아내는 어떻게 뉴욕의 요리학교를 다니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아마도 그가 좀 더 뉴요커다운 행색이었다면, 그게 어떤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린 별로 안 궁금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전라남도 보성 시골(‘시골’을 강조했다)이고, 요리사가 너무 되고 싶어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를 졸라서 뉴욕 가는 비행기 티켓과 최소한의 경비만을 받아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아마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아들이 정확히 미국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실 거라는 말을 웃으며 덧붙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인 학생과 방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최근에 독립해서 혼자 살게 되면서 침대와 여러 가지 세간들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린 그에게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냄비를(장차 요리사가 될 사람에게!) 포함한 부엌 집기들을 ‘덤’으로 더 주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와 아내는 그가 차에 짐을 싣는 것을 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작은 차에 어떻게 그 기다란 침대 프레임이 들어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우리 집을 방문했던 마지막 ‘하인’은 남아 있던 마지막 물건들을 혼다 시빅의 트렁크와 뒷좌석에 꾸역꾸역 싣고 천천히 사라졌다. 우리 집은 하인이 싣고 간 물건의 부피만큼 더 휑해졌다. 그리고 휑해진 집엔 나와, 나와 연극 <결혼>과 진짜 결혼을 모두 함께 한 ‘여학생’이었던 아내와, 우리 부부의 또 다른 ‘덤’인 우주와 누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