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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Sep 20. 2022

원고지

1부 쓰기 전

원고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장편 소설 따위는 쓰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하루키를 포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고 싶어 한다.

몇 년 전 원고지 1100매가 조금 넘는 분량의 장편 소설을 출판했다. 이제 나도 그 (제정신이 아닌 사람) 부류에 합류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천 매가 넘는 원고지를 메운 내 노력에 감탄했다. 내용에 대해서 별 얘기가 없었던 걸 보면, 아마도 다 읽지 않았거나 다 읽고 별로였지만 노력의 숭고함에 압도되어 재능을 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의한다. 부디 재능은, 혹은 소설의 수준은 논외로 하자.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또한 천 매가 넘는 글을 써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전에 여기저기서 글을 써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같이 SNS 포스팅이 넘쳐나는 시기에 글 한 번 안 써본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 그냥 ‘글’이 아닌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로 바꿔 보자.    


굳이 10장이라고 정한 건 이게 본격적인 글쓰기의 최소단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점이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장편소설을 쓰게 만든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리 길은 한걸음 부터일 수 있지만 천 장의 글은 열 장부터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에서 글을 쓰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원고지 열 장이라고 했다. 글 좀 써봤다면 ‘에이 그쯤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막상 써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원고지 대여섯 장 정도의 글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즉시 일필휘지로 마무리할 수 있지만 10장이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서론 본론 결론의 내용과 분량을 어느 정도 정해야지만, 즉 계획을 세워야지만 글을 완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고지 10장을 규칙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건 본과 3학년 때부터였다.

왜 그때였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연극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내 의과대학 생활의 팔 할은 연극반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더 이상 연극반 공연에 참가할 수 없었다. 연극없는 학교 생활은 지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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