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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Sep 22. 2022

독후감

1부 쓰기 전 

독후감


내가 기억하는 본과 3학년 생활이란 일찍 등교해서 천덕꾸러기로 레지던트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병원을 방황하다가 저녁 늦게 하교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맨날 책과 강의실에서 상상하던 환자를 실제로 본다는 기쁨이 약간 있기는 했다. 음, 솔직히 그거야 우등생들의 얘기고  아니었다. 내겐 사라진 연극을 대체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의과대학 축제 기간 중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원래는 서클룸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술이나 마시러  생각이었는데 게시판에 ‘4학년 분극의 밤 리허설 의대강당이라는 메모가 꽂혀 있는  보았다. 연습도 구경하고 술도  얻어 먹을  서클룸에 있던 김태용과 함께 강당으로 갔다.      

“자!”

 태용이 추임새와 함께 철가방에서 꺼낸 짜장면 그릇을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에게 무대 바닥 위로 스르륵 밀어 주었다. 짜장면 그릇을 받은 사람들은 나무젓가락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열심히 비벼서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있는 비닐랩을 벗겨냈다.

"리허설 봤지? 어때?"

"재밌어요. 근데 이 연극이 말하려고 하는 게 뭐예요. 주제를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왜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태용이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한수에게 건넸다. 

"죽이고 싶으면 그냥 총으로 쏘면 되지 굳이 공연을 할까요?" 내가 물었다. 

"두 아버지가 상징하는 건 운명이고 운명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니까. 인생이란 게 러시안 룰렛처럼 아슬아슬한 도박이잖아. 아무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 사정이 딱하다고 해서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우리를 봐주는 것도 아니고" 

나와 태용은 한수의 얘기를 들으며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탁 하나 하자.”

짜장면을 다 먹고 난 뒤 4학년 박한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 독후감 하나 써라.”

박한수가 말하는 독후감이란 의사 신문<메디컬 오피니언> 문화면에 고정적으로 실리는 서평이었다. 자신은 도저히 짬이 나지 않으니 나보고 써달라는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글이란  별로 써본 적도 없었지만 덜컥 하겠다고 했다. 원고지  장이 조금 넘는 분량의 본문과 약간의 인용문.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앞으로   동안  칼럼을 매달  편씩 쓰게  운명이었다. 박한수는 그날 이후로 칼럼을 쓰지 않았다. 의사국가고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합격률은 육십 퍼센트 정도였고 역대 최저였다.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이나 가끔 읽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전들을 읽어야 했다, 그것도 의학적인 내용이 나오는 책을 골라서! 가끔 박한수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는 수험생이었다. 독서와 글쓰기의 경험 모두 부족한 내가 적당한 책을 고르고 꼼꼼히 읽고 글까지 써야 하니 한 달이라는 시간도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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