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의 변화 Oct 05. 2022

편지(1, 2)

1부 쓰기 전 

편지      


저녁을 먹고 내무반으로 들어와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1층 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휴전선 근처에서 시작된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사관후보생을 포함한 후방의 군인들도 전방으로 투입돼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지시에 잘 따라 주기 바란다.”

각이 날카롭게 잡힌 전투복을 입고 나타난 훈육대장이 비장하게 얘기했다. 

순간 강당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훈육장교가 손바닥만한 비닐백을 나눠주면서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서 넣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뭐야 진짜야, 강당 안이 술렁였다. 또 다른 훈육 장교는 검정 모나미 볼펜과 편지지를 나눠주면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강당에 모인 후보생들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영천역에서 전방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한다. 열차번호를 불러줄 테니 모두 잘 기억해서 혼란 없이 일사불란하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한참 동안 군번과 열차번호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훈육 대장은 열차번호를 모두 부르고 나서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군사기밀이라고 했다. 


호종이 강당으로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장내 방송이 울려 퍼지는 내내 몰래 연병장에 묻어둔 핸드폰으로 여자 친구랑 통화를 하고 들어온 호종은 자초지종을 듣고 패닉에 빠졌다.

“너 뭐야!” 

“314번 사관후보생 나호종.”

“너, 뭔데 지금 들어와. 전쟁이 터졌는데 정신 못 차려!”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훈육 장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열차번호를 못 들었습니다. 제발 알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제발!” 

호종이 절규하듯 외쳤다.  

“못 들었습니다. 제발 알려 주십시오..”

호종이 울먹이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울먹이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강당 안을 메웠다. 훈육 대장이 군기가 빠졌다며 호종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강당 밖으로 나갔다.

“너무 심각한데요. 언제 알려주실 겁니까?” 

“재밌는데 좀 더 두고 보죠. 이것도 훈련이잖습니까.” 

방송실 마이크가 켜져 있었다. 방송실에서 키득거리는 훈육 장교들의 대화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육 장교들이 꾸민 쇼였음을 알고 분노한 사관후보생들의 항의로 훈련은 종료됐다.   


푸하하하.

호종의 쪽팔렸던 얘기가 끝나자마자 서준석이 믹스 커피를 거의 내뿜을 뻔했다.  

“야, 후보생! 유격 빡씨냐?” 

호종이 담배를 달라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돗댄데?” 

내가 구겨진 담뱃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씨바. 전우끼리 치사하게 이럴래. 내무반 가서 디스 한 갑 줄게.” 

“전우는 무슨 얼어 죽을. 옛다. 돗대. 유격 갈 때는 버스 번호 절대 까먹지 마라.” 

서준석이 담배를 건넨 뒤 호종의 등을 툭툭 손으로 쳤다. 그리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버스 번호를 못 들었습니다. 제발 알려주십시오.” 준석이 호종의 말투를 흉내 내어 크게 소리를 지르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군의관이 되기 위해서 훈련 중인 후보생 신분이었고 예배가 시작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당시는 7주 군사 훈련 중 가장 힘들다는 유격훈련이 있는 기간이었다. 우리 훈육대가 먼저 오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화산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왔고 호종은 다음 주 예정이었다. 그 사이에 훈육 장교들이 벌인 전쟁 해프닝이 있었던 것이다.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 일요일마다 예배를 보았다. 설교강단 왼쪽에는 플랭카드가 길게 세로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호수아서가 적혀 있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하지만 나는 강하고 담대하기는커녕 초코파이와 커피를 받은 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를 들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종이컵 속에 눈물이 퐁, 퐁퐁, 퐁퐁퐁퐁 떨어지고 있는 동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사를 울먹거리며 따라 부르는 동안, 신혼집 거실의 유리창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오던 햇살과 느긋하게 누워서 야구 중계를 보던 베이지색 소파와 임신 5개월의 아내를 떠올렸다. 이 노래가 원래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교회에서 복귀하면 틈틈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훈육 장교가 나눠 준, 푸르스름하게 훈련소 정문이 인쇄된 편지지가 모자라서 다른 이들에게 빌려서 매주 쓰고 또 썼다. 

점호 때마다 관물대 물건의 각을 맞춰주던 영상의학과와, 요로결석으로 고생했던 내과와, 아침 구보를 힘들어했던 정신과와,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흉부외과 후보생에 대해서 썼다.

아침 저녁으로 연병장을 뛰어다니고, 영하의 날씨 속에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방독면을 쓴 채 눈물 콧물을 흘리며 ‘가스! 가스!’를 외치고, 사격 훈련을 마치고 별을 보며 내무반으로 복귀하던 일에 대해서 썼다. 

삼월이 됐어도 칼날 같았던, 교정을 떠돌던 겨울바람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던 애국가에 대해서 썼다. 하늘로 쭉 뻗은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 숲과 나무 줄기를 타고 수직으로 잽싸게 내려오던 청솔모와, 이들과 함께 서서히 내려앉던 어둠에 대해서 썼다. 어둠과 정적을 뚫고 울려 퍼지던 국기 하강 나팔소리와 간간히 지저귀던 새소리에 대해서 썼다. 

어떤 소설가의 말처럼 훈련소 시절은 읽을 수 있는 책이 성서밖에 없는 중세였다. 밤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성경책을 꺼내 아가서를 읽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서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아내가 보낸 편지 속에 붙어 있던 큰아이의 초음파 영상이 떠올랐다. 첫 휴가를 나갈 때까지 시간이 바람처럼 빨리 달려 노루와 사슴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매일 밤마다 기도했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편지(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