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by 생각의 변화

우승


2009년 나는 2년 동안 일했던 E병원을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겼다. 직장을 옮긴 이유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이 너무 많았고 미래가 불투명했다. 당직을 선 다음 날은 늘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언제까지 당직을 설 수 있을까? 응급실 당직이라는 것은 전문의에게도 초짜 인턴만큼이나, 체력적으로는 오히려 더, 힘든 일이었다. 응급실 당직을 서는 의사들은 아무리 일이 익숙해져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밤을 새야 한다. 밤을 새면서 일을 해야 하니 육체적으로도 소모적이었고 일하는 시간 동안 내내 다른 사람들-환자, 보호자, 타과 레지던트, 타과 과장, 간호사, 방사선사등 등등-과 부딪히는 일이 잦으니 정신적으로도 소모적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근무를 하고 난 후 이틀 정도는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TV를 볼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TV라는 것이 결국 ‘사람’과 ‘말’의 잔치 아닌가. 당직 선 다음 날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한다는 것이 피곤하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직장으로 옮길 것인지를 확실하게 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E병원에서 평생 일할 것 같지는 않다는 막연한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굴까? 도서관 통로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나 ㅇㅇ인데, 우리 병원에서 일할 생각 없니?”

강남에 위치한 화상 전문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 Y였다.

생각해보니까 이 년 전에도 다른 선배로부터 이와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E병원에서 근무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선배가 자신의 병원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이제 겨우 한 달 일했는데 어떻게 옮겨요?, 당시의 나는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일초도 생각해보지 않고. 하지만 그 날은 좀 달랐다.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본다는 것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 옮기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전화를 받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병원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몇 달 후 나는 Y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병원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고 수술을 배우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한 가지 더, E병원에서 근무할 당시에 나는 국문학과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근무가 없는 날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육 개월 정도 걸려서 쓰고 있었던 석사논문이 완성단계였지만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미처 마무리를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틈틈이 짬을 내서 논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2009년 가을학기에 국문학과 석사가 되었다.


2009년은 이래저래 내게 의미 있는 해였다. 응급실 당직이라는 소모적인 일에서 벗어나서 화상 수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 해였고, 삼 년 동안 다녔던 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게 된 해였기 때문이다. 2009년 당시의 나는 다른 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응급의학과 전문의이면서, 그보다 좀 더 소수인 화상외과의 중에 한 명이면서, 그보다 더 극소수인(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국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의사가 되었다.


개인적인 성취 외에도 2009년이 내게 의미 있는 해가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2009년이 타이거즈가 십이 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해였기 때문이다. 2009년 조범현 감독이 이끄는 타이거즈는 2000년대 초반의 절대강자였던, 한국시리즈 3연패를 노리던 김성근 감독의 와이번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 끝에 V10(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극적인 역전승으로.

어린 시절 나는 타이거즈의 팬이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야구를 열심히 챙겨서 보지 않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가 된 시점부터, 어쩌면 선동렬 선수가 주니치 드래곤즈로 간 후부터 야구는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팬들의 마음은 비슷한 면이 있다. 성적이 좋을 때는 여기저기에 팬이 넘치는데 성적이 안 좋을 때는, 그것도 오랫동안 안 좋을 때는 팬들은 어느 곳에도 없다. 팀의 성적과 함께 오랫동안 잠수를 탄다. 엘지 트윈스가 2014년 시즌 2위로 포스트 시즌에 나가기 전에는 트윈스 팬들에게 야구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은 한 때 트윈스 팬이었지만 지금은 야구를 끊었다고 대답하곤 했다.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엘롯기 동맹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로이스터 감독의 롯데 자이언츠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랬다. 만년 하위팀 기아타이거즈를 응원하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어디 팬이냐고 물어보면 같은 식으로 대답하곤 했다. 옛날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지만 이제 야구를 끊었다고.

하지만 야구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기아 타이거즈의 성적이 좋아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꼽으라면, 내가 E병원에서 응급실 당직을 섰기 때문이다. E병원에서 응급실 당직을 서는 것과 야구를 보기 시작한 게 무슨 상관이냐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관련이 있다.


복잡하지만 설명을 해 보자면, 응급실 당직을 서면 당직실과 응급실을 근무시간 내내 왕복하게 된다. 응급실이 한가하면 응급실 내에 있는 당직실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면서 보내는데, 나는 주로 TV를 보는 쪽이었다. 중요한 것은 TV냐 인터넷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이다. 무엇을 보는 것이 왜 중요한 문제냐 하면, 좀 우습지만, 인턴들이 당직실에 불쑥 들어와서 환자에 관한 것을 보고하거나 물어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자. 나는 당직실에서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어딘가에서 채널이 정지한다. 물론 나의 의지로 선택한 채널은 아니다. ‘불행히도’ 난 영화의 제목조차 모른다. 인턴(여자면 더더욱 곤란해진다)이 환자에 대해 얘기한다. TV 속에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 처음에 이들은 대화를 한다. 하지만 인턴의 노티를 듣는 동안 이들의 대화는 사랑의 속삭임으로 변하고 급기야 격렬한 베드신으로 이어진다.

당직실에 있는 나와 인턴 사이에는 더 이상 점잖게 환자 얘기를 하고 있기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리모콘을 이용해서 TV를 꺼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왠지 그게 더 어색할 것 같아 그만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괜찮은 해결책은 ‘나가서 (환자를) 같이 보자’고 얘기하면서 당직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쩌다가 한두 번이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특히나 새벽으로 갈수록 케이블 TV에서는 19금 영화를 방송하는 빈도가 많아진다- 뭔가 음란한 취미를 가진 이상한 교수로 찍힐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내가 생각해낸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럴 위험이 전혀 없는 채널을 보는 것이다. 게임, 바둑, 낚시, 홈쇼핑과 같은 채널도 괜찮지만 불행히도 내가 전혀 취미가 없는 내용들이어서 당직을 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스포츠, 그중에서도 프로야구였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는 타이거즈의 성적과 관계없이 2007년부터 타이거즈의 ‘잠수’ 탄, 남들이 물어보면 야구를 끊었다고 얘기하는, 팬이 되었다. 딱히 프로야구에 관심이 있어서 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다보니 왠지 타이거즈에 대한 옛정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E병원에서 내가 응원해주는 이 년 동안 타이거즈는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9년 타이거즈의 반등을 예상한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팀 전력이 딱히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9년 타이거즈의 우승은 내게 더욱 특별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타이거즈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2010년 5위, 2011년 4위, 2012년 5위. 하지만 의사로서의 나는 2009년보다 점점 더 좋아졌다. 국문학과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의과대학에서 ‘문학과 의학’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몇몇 대학에서 특강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2009년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화상학회와 2012년 네덜란드 덴하그에서 열린 유럽화상학회에서 발표를 했고, 몇 편의 논문들을 국내 외 학회지에 게재했다. 2012년에 대한화상학회에서 우수 발표자상도 받았다. 하나하나를 따지자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롭게 시작한 화상외과 의사로서, 국문학 석사 학위를 가진 의사로서 나름대로 좋은 출발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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