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
누리가 약을 먹기 시작한 뒤 아내는 여러 경로들을 통해서 ADHD라는 병의 예후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에 관한 지식이 쌓일수록 우리 부부는 조금씩 더 절망했다. ADHD를 진단받은 아이들의 예후는 그리 좋지 못했다. ADHD는 사춘기나 중2병처럼 한 때 앓고 지나가는 성장통이 아니었다. ADHD는 원인과 증상, 그리고 예후가 알려진 엄연한 질병이었고 누리는 일정 정도의 장애를 지닌 아이였다. 덧붙이자면 현재는 장애를 지닌 아이이면서 미래에는 장애를 가진 어른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ADHD를 진단받은 많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누리가 앞으로 겪게 될 가장 가능성이 많은 ‘운명’이었다. 아내는 원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두 병원의 정신과 의사가 내린 진단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고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쉽게 받아들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내는 자신이 알아본 누리의 운명에 절망하지 않았고 누리를 데리고 그룹치료와 놀이치료를 다니면서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을 하면서 누리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일은 점점 더 아내를 육체적으로 지치게 했다. 누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금방 좋아지지 않았다.
아내는 정신적으로도 조금씩 지쳐갔다. 아무도 우리에게 누리가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얘기해 준 사람은 없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 불행하게도 우리 부부의 ‘절망’은 가끔씩,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는 굉장히 자주, 우주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왜 우주는 성실하지 않을까. 왜 우주는 다른 집 아이들처럼 유순하지 않을까. 왜 우주는 누리에게 너그럽지 않을까. 왜 우주는? 왜 우주는?
우리 가족은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집에서 유일하게 밝고 명랑한 사람은 저녁만 되면 명랑해지는 누리뿐이었다. 우주는 밤늦게까지 테니스를 치다가 여덟 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아내는 병원일과 집안일로 늘 피곤해 보였고, 나는 그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아니 무관심하고 싶었다.
그 당시에 나는 자운대에서 보냈던 군의관 시절을 그리워했다. 우주가 태어났던 2002년으로부터 약 십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집은 전혀 다른 집이 되었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집안의 모든 이들을 기쁘게 했던 우주와 누리,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아내, 이들이 있는 집으로 퇴근하는 게 즐거웠던 나.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우리 집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그 시절에 찍었던 사진들 속에, 그리고 그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는 앨범 속에 깊숙이 숨어 버렸다. 반항적이고 항상 불만이 많은 큰 아들과 ADHD를 앓는 둘째 아들, 일과 가족에 지친 아내, 그리고 무관심한 아빠. 이것이 바로 2011년 우리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약간의 절망, 미래에 대한 걱정, 반복되는 피곤, 의도된 무관심, 이런 조그맣고 사소한 것들이 나와 아내의 마음 속 그늘에 조금씩 쌓여갔다. 그리고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겁고 어두워졌다. 가끔씩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누리는 그런 병에 걸렸을까. 왜 우주는 나를 매일 화나게 할까. 왜 나는 평범한 아이들의 아빠가 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 아이들의 아빠이어야만 할까.
2011년 겨우내 나는 점점 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무기력했고, 환자들에게는 무뚝뚝했고, 집안에서는 무관심했다. 아내는 나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랬다고 한다. 모든 얘기는 그 시절이 조금 지나서 아내에게 들은 것이니까.
내가 아는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이 감기와 같다고 했다. 흔하고 잘 낫잖아. 잘 낫는다는 건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흔하다는 건 인정하게 됐다. 우울증 약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아내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얘기하고 조언을 구했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에게, 병원을 개원한 선배에게, 심지어 누리의 주치의 선생님에게도. 신기했던 건 그들 모두가 항우울제를 먹고 있거나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일이 힘들어서, 자식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냥 시시콜콜한 걱정거리들 때문에 사람들은 항우울제를 먹었다. 우울증이 감기와 같다면 항우울제는 감기약과 같은 것이겠지. 그러니 증상이 심하다면 먹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미국으로 연수를 가기 사흘 전에 근형을 만났다. 근형은 나보다는 삼 년 위였고 학교 선배이면서 동시에 연극반 선배이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친했는데 직장이 가깝다 보니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자리는 ‘소문’이 대신하는 법이다. 연극반 모임에서 근형은 연락을 끊고 지내는 사람이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단단히 삐진 사람이었다가, 중국 진출을 알아보는 의사였다가, 애들 교육을 위해서 이사를 다니는 맹부였다가, 조심스럽게 이혼의 위기에 놓인 남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연락이 닿았다. 특별한 뭔가를 한 것은 없었다. 단지 문자를 두세 번 보냈을 뿐.
그날 만난 근형의 모습은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밝고 건강해 보이고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이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모습.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그동안 연극반 모임에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폰 때문이야. 몇 달 전에 아이폰의 컨트리 락(country lock)을 풀었어. 미국 마켓에서 검색과 구매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고. 그런데 동기화 시키다가 주소록이 날아가 버린 거야. 지금 같으면 어디 백업이라도 해놨을 텐데.”
“예전 통화 내역 확인하면 되잖아요.”
“그게 정상적이지. 그런데 그때는 모든 게 너무 귀찮더라구. 나는 멀쩡하고 폰이 이상해진 건데, 폰이 이상해지니까 내가 이상해지는 해괴한 상황이 된 거지. 그래서 아이·폰인가봐. 황당한 얘기지만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났다.”
폰이 사라진 후에 근형이 겪었던 증상들은 내가 경험한 증상과 많이 비슷했다.
아이폰이 ‘나는 폰’이라는 의미라면, 아이폰은 근형이 갖고 있는 기억의 일부 또는 전부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텅 빈 표면으로 사는 것과 같다. 알맹이가 증발해버린 거품 같은 존재. 그는 좋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 연락도 받게 된 거라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으로 우울해진다면 기억을 만드는 것으로 우울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09년 한국시리즈는 6차전까지 타이거즈와 와이번스가 승리와 패배를 서로 주고받는,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 막상막하의 양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7차전은 극적인 승부의 백미를 보여주었다. 6회 초까지 1대 5로 뒤지고 있던 타이거즈는 와이번스가 자랑하는 철벽 불펜을 만나게 된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 타이거즈의 코치가 정규 시즌 중에도 타이거즈가 와이번스를 상대로 6회 이후 4점차 이상을 뒤집은 적이 없다고 했다. 비단 타이거즈여서가 아니라 다른 팀 또한 와이번스 불펜을 상대로 4점차를 뒤집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와이번스는 정규시즌 막판의 19연승을 조력한 불펜의 힘으로 한국시리즈 3연패를 무난히 달성할 것만 같았다.
야구는 인생과 닮았다. 하지만 수많은 스포츠 중에서 야구만이 인생을 닮은 것도 아니고 모든 야구 경기가 인생을 닮은 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든 스포츠의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극적’인 인생을 닮았다. 2009년 한국 시리즈 전체가, 특히 궁지에 몰렸다가 기사회생했던 한국 시리즈 7차전이 타이거즈 팬이었던 내게 더더욱 그 인생을 닮은 듯이 보였다.
많은 이들은 야구에서 ‘극적’이라고 얘기하려면 9회 말 투아웃 만루에서 역전 만루홈런이 터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끝내기 안타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 생각엔 그런 특수한 상황보다는 야구의 흐름과 관련된 일반적인 속설- ‘찬스 뒤에는 위기가, 위기 뒤에는 찬스가 온다’와 같은-과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생도 늘 좋은 일 속에는 나쁜 일이, 나쁜 일 속에는 좋은 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잘 나간다고 생각될 때 위기는 어느 순간에 내 뒤통수 바로 뒤에 와 있는 법이니까.
가끔 절호의 기회가 완벽하게 위기라고 생각한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타이거즈의 절체절명의 위기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을 것 같던 4점차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그토록 막강했던 와이번스의 철벽 불펜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전 경기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그 불펜의 등장이, 타이거즈에게는 역전의 계기를 만들 기회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전까지 너무도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막강했다는 것은 감독이 그만큼 신뢰했다는 것이고, 감독이 신뢰했다는 것은 더 ‘많은’ 경기에서 더 ‘일찍’ 투입되었다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지쳐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들이 투입된 시점이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한 해 야구 시즌의 마지막인 한국시리즈 7차전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일반적으로 투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구위가 떨어지는 반면 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력이 올라간다고 한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지쳐 있는 불펜 투수들과 집중력이 최고조인 타자들의 싸움에서 승자는 결국 타자 쪽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결국 타이거즈의 타자들은 와이번스의 막강 불펜을 상대로 넉 점차를 뒤집었다.
야구처럼 인생의 위기 속에도 항상 역전의, 또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 2012년이 되어도 우리 집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2011년이 아니라 2012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이 되었다는 것은 병원에서 보내주는 일 년 동안의 연수를 갈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내는 지쳐 있었고 가끔씩 항우울제를 먹었고, 간절하게 쉬고 싶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연수 병원을 정하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불행히도 당시까지의 진행 상황은 실망스러웠다. 2011년 말부터 연수를 가고 싶은 병원의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지만 자신의 병원으로 오라고 답장을 보내 준 병원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초조하고 답답했지만 그냥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거의 포기 상태였을 때 전혀 엉뚱한 곳에서 기회가 생겼다. 컨퍼런스 때 우연히 만난 선배가 자신이 연수 갔던 병원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쪽 병원의 교수가 화상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봄 학회 때 강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포트제퍼슨 대학의 교수를 만났고 며칠 뒤 그쪽 대학 비서에게 이력서를 포함한 여러 서류를 이메일로 보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늦어도 8월에는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