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생각의 변화

프롤로그


2012년 10월이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이 주일 전 쯤 이었을 것이다. 나는 우주와 누리의 영문 출생증명서를 발급 받기 위해서 대전의 M산부인과로 향했다. 서울의 집에서 출발해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북대전 톨게이트를 지나 둔산동에 있는 M산부인과에 도착했다. 건물 뒤편에 있는 공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병원으로 들어가서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영문 출생증명서를 신청했다. 우주는 2002년에, 누리는 2004년에 그 곳에서 태어났다. 기다리는 동안 외래 진료실과 위층 병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슬쩍 둘러봤다. 병원의 모습이 그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때의 일들이 드문드문 기억났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우리 가족이 삼 년 동안 살았던 자운대를 들르고 싶어졌다. 그날의 일정은 현재에서 출발해 십 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시간여행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주와 누리가 태어났던 그 때가 떠오르면서 이따금씩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때론 특정한 장소와 건물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 내기도 한다. 하지만 신기한 건 매번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후로도 몇 번 더 대전에 내려가고 M산부인과 근처를 여러 번 지나갔지만 다시 그런 기억과 감정들이 떠올랐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시간여행이 되고 시간여행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장소 외에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다. 그게 대체 뭘까?


이 글은 이미 내가 경험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쓰는 작업이었지만 단지 ‘기억’만으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글을 쓰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그 시절에 내가 이런 걸 했었는데······’라는 막연한 진술만으론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고 더군다나 그 시기의 감정에 집중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어쩌면 천재적인 작가들은 기억과 상상력만으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딱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트루만 카포티는 살인범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도 녹음이나 메모를 하지 않고 기억과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캔자스 주 홀컴 마을의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룬 <인 콜드 블러드>라는 걸작을 남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카포티 같은 수준의 작가가 아니다.


카카오 스토리에 틈틈이 기록했던 경기에 대한 짧은 요약들과 스코어 기록 어플리케이션인 게임체인저(Game changer)가 몇 년 전의 기억을 재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피카렐라 감독을 포함한 다른 부모들과 주고 받았던 수많은 이메일과 그 당시에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은 그 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당시 감정에 집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전히 새로운 경기들로 갱신되고 있는 리틀리그 웹사이트의 과거기록, 구글어스로 볼 수 있는 옛 집과 주변 길의 풍경(꼭 글을 쓸 목적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가끔씩 그곳에 들어가 모니터 화면 속을 거닐어 보곤 한다), 집에 남아 있는 야구용품, 트로피, 그리고 그 외에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소품들도 막연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빈틈을 메우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때로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쥐어 짜내기도 했다. 그래도 정 모르는 것들은 아내에게 물어서 확인을 했다. 가끔씩은 나와 아내가 몇 년 전의 일을 너무 구체적인 것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서로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빈틈은 남아 있었고 기억의 구조물은 허술할 때가 많았다. 그 허술함을 내 빈곤한 상상력이 잘 채워주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2012년 M산부인과를 다녀오면서 느낀 먹먹한 감정을 촉발시킨 주범이 ‘출생증명서’라는 아주 사소한 소품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출생증명서에 기술된 무미건조한 단어들도 그걸 읽는 어떤 이에게는 소중한 기억과 감정을 만들어 내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과거를 소환해내는 일종의 주문이라고나 할까?

영화 <A.I.>에서 엄마를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하는 아동 로봇 데이빗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외계인들은 데이빗에게 엄마의 머리카락으로 부활시킨 엄마 모니카의 유효기간이 단 하루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루가 지나면 엄마는 무의식상태에 빠져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엄마 모니카는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얘기한 모든 것들-기억, 이메일, 웹사이트, 구글어스, 야구용품, 트로피-로 재구성된 세계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결국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록 하루는 아니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부활된 일부의 기억이 유효기간을 다하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데이빗과는 다르게 머리카락이 아닌 수많은 단어들로 직조된, ‘특별한’ 기억의 조각들을 이 곳에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이 기록이 ‘특별한’ 것이길 바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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