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아웃
롱아일랜드에 막 도착했을 당시만큼은 아니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지 다섯 달이 지난 4월에도 저녁이 되면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멀리 간다고 해봐야 아파트 사무실에 있는 실내 체육관이나 집 근처의 세븐일레븐 정도를 다녀오는 게 전부였다. 아이들만을 혼자 두고 나가는 것이 걱정이 되기도 했고, 낮에 대부분의 장을 보고 오기 때문에 딱히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4월에 리틀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서, 야간경기를 하기 위해서 밤에 외출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국에서 올 때 겨울 옷만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우리에겐 딱히 봄옷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주와 나는 늘 겨울 옷 차림으로 옷세고 파크로 향했다.
첫 경기 때 관중석의 부모들을 보면서 의아했던 일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올 뿐 아니라 꽤 두툼한 담요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아니, 4월인데도 그렇게 추운가.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첫 게임 때는 긴장해서 잘 몰랐지만 롱아일랜드의 4월 밤 추위는 무척이나 매서웠다. 바람은 옷 속을 파고들었고 서 있으면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앉아서 관람을 한다면 담요가 아니라 모닥불을 피워도 과하지 않았다.
하프할로우힐 리틀 리그와 내 어린 시절의 동네 야구가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관중’이었다. 가끔씩 부모들의 응원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부분이었다. 아이들의 경기에서 부모라는 관중이 있다는 사실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았다.
패자를 위로해주고 승자를 축하해주는 것도 관중의 일이었고, 헛스윙 삼진을 당하거나 내야에서 평범한 땅볼을 알 까고 울고 있는 선수들을 달래 주는 것도 관중의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리틀 야구가 아마추어들의 경기라고 해도 관중이 없는 경기는 관객이 없는 연극과 같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냥 그들만의 ‘플레이’일 뿐이다.
첫 경기를 하고 나서 나흘 후인 4월 17일 저녁에 애슬레틱스와 두 번째 경기를 가졌다. 우리 팀 선발은 닉이었다. 닉은 신장이 커서 공을 놓는 타점이 높고 공의 스피드도 좋았지만 제구가 잘 안됐고 자신감이 조금 부족했다. 닉은 수비를 잘 했다. 땅볼이나 공중볼을 포구하는 능력도 좋았고 어깨가 좋아서 송구가 강하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타격만은 완전 젬병이었다. 닉은 삼진을 당하고 난 후에는 덕아웃에서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곤 했다. 닉의 아빠는 연습할 때마다 등에 ‘NYPD’라고 쓰여 있는 후드티를 입고 왔다. 그 때문에 그가 뉴욕경찰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버드 대학 저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버드 대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런 내 추론이 얼마나 비약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 두세 겹의 짙은 눈 밑 주름, 그리고 입 주변과 턱을 뒤덮은 거뭇거뭇한 수염. 아마도 장 르노를 연상케 하는 그의 강한 인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외모 때문에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상상했지만 정작 그가, 그의 이름은 키이쓰 카스퍼(Keith Kasper)였다, 울고 있는 닉을 달래는 걸 보면 한없이 자상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1,2회에 우리는 석 점을 내줬다. 피카렐라는 존으로 투수를 바꿨다. 존은 닉과 비슷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닉보다 공의 스피드가 좋았고 제구도 잘 되었다. 존은 우주보다 조금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눈이 크고 초롱초롱해서 똘똘한 인상이었는데 야구를 하는 모습이 진지하고 집중력이 좋았다. 아내는 존이 영화 <루키 어브 더 이어(Rookie of the year)>의 주인공 헨리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존은 주로 1루수를 보았고, 내셔널즈 부동의 4번 타자였다. 존 제이는 투구와 타격 모두 잘했지만 내 생각엔 타격 능력이 더 뛰어났다. 존의 타격 모습은 좀 독특했다. 타석에서 공을 기다릴 때 몸을 앞뒤로 흔들었는데 이것이 타이밍을 맞추는 자신만의 방법인 것 같았다.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에도 타이밍을 맞추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는 선수들이 있다. 엘에이 다저스에서 박찬호 선수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강타자 개리 셰필드는 공을 기다리는 동안 야구 방망이를 정신없이 앞뒤로 흔들었다.
존은 공을 맞추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파워와 배트 스피드가 모두 좋았다. 존의 타구와 다른 아이들의 타구는 질적으로 달랐다. 다른 아이들의 타구가 포물선으로 던진 것 같았다면 존의 타구는 직선으로 쏜 것 같았다. 우주가 들은 바로는 작년에도 피카렐라가 맡았던 내셔널즈가 작년에 우승을 했고, 그 당시 결승전에서 존이 만루 홈런을 쳤다고 했다.
존이 마운드 판 주변의 흙을 스파이크로 고르더니 연습 투구를 했다. 존은 거의 상체만을 이용해서 던졌다. 상체만으로 던지는 투구는 한계가 많다. 쉽게 설명하면, 하체가 뒷받침이 되지 않은 투구는 움직이는 바닥 위에서 사격을 하는 것과 같다. 쉽게 지치고 구속도 떨어진다. 제구력도 마찬가지다. 움직이는 바닥에서 사격을 하면 아무리 명사수이고 조준을 잘해도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존은 제구가 잘 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공의 스피드는 비슷했지만 제구력이 들쭉날쭉 했다. 하지만 오늘은 잘 되는 날의 존이었다. 존은 빠른 공으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하며 3회와 4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상대 선발은 왼손이었다. 지옥에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파이어볼러(fireballer)라고 할만한 스피드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좋은 공을 던졌다. 로건 대일리. 로건은 키가 작았지만 타점이 높은 오버핸드였고 볼의 스피드도 좋았기 때문에 치기 까다로웠다.
우주는 1회에 수비 때는 벤치에 있었고, 2회부터 3루와 1루를 봤다. 우리 팀은 로건의 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지는 못했지만, 상대팀 수비들의 실책과 볼넷 그리고 존의 적시타로 차곡차곡 점수를 모아서 4회에 7:3으로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우주는 2회에 3루를 훔치는 주자를 태그해서 아웃시키는 훌륭한 수비를 보여줬다. 우주는 오늘도 6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로건의 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지는 못했다. 3타수 무안타. 하지만 메츠전에서 잘 쳐서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4회가 끝나자 코치 중 한 명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누구더라. 존의 아빠였다. 우주를 5회에 마운드에 올리려고 하니 준비시켜 달라고 했다. 덕아웃에서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우주에게 5회에 마운드에 올라갈 거라는 말을 하니까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첫 경기 때만 해도 잔뜩 긴장해서 얼떨떨한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앞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5회에 우주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메츠 전보다 공의 스피드가 좋아졌고 제구도 좋았다. 세 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 처리 했다. 6회 초 우리 팀은 추가점을 내지 못했고 우주는 6회에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첫 타자를 2루수 실책으로 내보낸 후 2루 도루를 허용했다. 무사 2루. 넉 점의 리드가 있으니 주자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이후 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지만 그 다음 타자에게는 삼유(3루수와 유격수)간으로 빠지는 안타를 허용했다. 투 아웃 주자는 1, 3루. 우주는 마지막 타자를 1루 땅볼로 잡았다. 7:3. 우리 팀은 2승째를 거뒀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갈 때쯤 매튜의 엄마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매튜는 평소에는 장난기 가득하고 해맑은 표정이었지만 야구가 잘 안 될 때는 아기 같이 굴었다. 경기 중에 타석에서 삼진을 당할 때마다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매튜의 부모는 을러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매튜에게 야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가르치다뇨? 저는 그럴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우주가 야구를 잘하는 건 저 혼자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저랑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엔 다른 분에게 부탁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매끄럽게 전달할 수 있는 섬세한 영어 실력이 내게는 없었다. 슬쩍 우주의 눈치를 봤다. 우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주에게 매튜와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더니 내키지 않는 눈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꺼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며칠 후 매튜와 우주는 선컴 파크에서 만나서 한 시간 동안 함께 야구 연습을 했다. 여전히 롱아일랜드의 4월 밤은 추웠지만 매튜와 우주는 즐거워했다. 연습이 끝날 즈음에 매튜 아빠가 도착했다. 여기저기 허연 얼룩이 묻어있는 데님 멜빵 바지 차림이었다. 그가 야구 모자를 벗고 어색해 하며 아들과 놀아줘서 고맙다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하는 그의 손이 거칠고 두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