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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뜬금없는 사색

by 최용훈

나폴레옹은 ‘지도자는 희망을 거래하는 사람이다.’(A leader is a dealer in hope.)라고 말했지요. 거래한다는 것은 사고판다는 뜻이니 지도자가 그를 따르는 이에게 일방적으로 희망을 주기만 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거꾸로 지도자도 추종자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어야 하지요. ‘희망을 사고팔다.’ ‘희망을 주고받다.’ 그것이 삶에서 마주치게 될 어떠한 승리에서도 필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자신의 시에서 희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희망은 깃털이 달린 그것-

영혼의 횃대에 앉아-

말없는 음조로 노래하며-

결코 그 노래를 멈추지 않는-


희망은 깃털 달린 ‘새’라는군요. 누군가의 영혼을 횃대처럼 붙들고 영원히 멈추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그 새는 바로 희망입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멈추지 않을 희망이라는 노래. 하지만 깃털 달린 새는 언젠가 가지를 버리고 날아가 버릴 수도 있지요.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욕망, 동경, 그리움 혹은 기쁨이나 슬픔처럼 희망도 우리에게서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마저 사라지고 만다면 무엇이 남겨지게 될까요?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희망 없이 하는 일’(Work without Hope)이라는 시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든 자연은 일하고 있다. 달팽이도 잠 깨어 나오고

벌들은 분주하고 새들은 창공을 난다

밖에서 잠을 자던 겨울은

봄을 꿈꾸는 듯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유일하게 바쁘지 못한 존재로

꿀을 만들지도, 짝짓기를 하지도, 집을 짓지도 노래하지도 않는다.


희망이 없으면 모든 일이 의미를 상실합니다. 우리는 꿈을 꾸듯 희망을 꿉니다. 그래서 희망과 꿈은 동의어이죠.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그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꿈, 그것이 희망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살겠습니까.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 숨 쉴 뿐, 언젠가 사라져 갈 육체와 영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희망 없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희망은 날개 달린 새와도 같아서 언제든 제 멋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꼭 쥐어야지요. 내 안에 희망의 둥지를 만들어 그것이 살게 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날개 꺾인 새가 될지도 모릅니다.


꿈을 꼭 잡아요.

꿈이 죽으면

삶은 날개가 부러진 새가 되어

날지 못할 테니까요. (랭스턴 휴스, 미국 시인)


우리의 삶이 괴로운 것은 혹시 희망이 줄어들어서는 아닐까요?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무기력감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바쁘지 못한 ‘희망 없는 일’에 스스로 절망해서인 것이 아닐까요? 아!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이 무슨 의미만을 쫓아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을진대, 굳이 애쓰지 말자고요. 희망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해 낼 수 있다는 꿈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오늘 나의 시간이 주어지듯 내게 주어진 고마운 하나님의 축복일 뿐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오롯이 가슴에 품고 다독이며 살아야겠습니다. (쉿! 사실 희망은 너무 많이 쓰이는 실체 없는 낱말일지 모릅니다. 오늘 세끼 잘 먹고 열심히 생각하고, 일하고, 쉬고, 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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