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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7. 2024

아침, 조용한 매미소리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컴퓨터를 켠다. 퇴직 이태 전 코로나가 기승을 떨 때부터 생긴 습관이다. 내 침대 바로 옆에 책상이 놓여있어 수고스럽게 움직일 필요도 없다. 그저 일어나 앉으면 그만이다. 빈문서 창이 뜨면 잠시 화면을 노려보다가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자판을 두드린다. 의미 없는 이야기들,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들, 유치한 단어의 배열에 눈살을 찌푸린다. 잠시 화면을 버리고 인터넷을 접속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다. 파도를 헤치듯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 순간 내 마음에 다가오는 주제들을 검색한다. 진부하다. 간혹 희미해진 내 마음의 열정에 분노마저 느낀다. 모두가 소중한 글들인데... 이 글을 만들려고 고민하고 지우고 또 고민했을 텐데, 마음의 불이 지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시들을 찾아본다. 찡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을 때는 ‘내가 시인이라면...’이라는 상상에 빠진다. 무엇을 쓸 것인가? 내게 시심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있을까?‘ 결국 모두를 실망시키는 무미건조하고 사변적인 산문으로 그치지 않을까? 그래서 시인은 따로 있는 것이겠지. 쓴웃음과 함께 시의 창을 닫아버린 나는 이번엔 애써 과거의 경험들을 떠올린다. 주변에서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 그것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는 없을까?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비슷한 삶, 비슷한 경험을 하고 살아가니까. 그런 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할 재주가 내겐 없으니까. 


그래서 잠시 컴퓨터 곁을 떠난다. 정신이 나도록 찬물로 샤워를 해볼까? 커피? 찬물 샤워조차 귀찮은 마음에 진한 커피 한 잔을 만든다. 빈속이라도 괜찮다. 난 커피를 마셔야 잠이 오는 체질이니까. 커피 향의 도움으로 새로운 의욕이 솟아난다. 책상 앞의 작은 책장에 무수한 제목들이 보인다. 수년 동안 꺼내보지도 않은 책들... 그래서 얼마 전 결심을 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책들을 모두 버릴 거라고. 하지만 아직도 그것들은 거기에 있다. 무슨 미련일까?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라는 착각? 그것들을 손에 넣기까지의 그 설레는 기억?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이제 나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사실뿐이다. 


늙은 것일까? 벌써?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던, 하지만 괴로움과 권태와 실망 속에서도 때론 작은 기쁨과 희망과 의욕에 힘을 얻던 시간들... 그런 일상의 부대낌이 가끔 그리워진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기뻐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 순간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깨닫는 요즘이다. 언젠가는 잊히고 언젠가는 멈춰 서야 하는 세월의 축적. 그리고 다시 새롭게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재생의 시간. 인생의 매 단계에 새로이 부딪히는 이 삶의 물결이 좋다. 힘들어도 무료해도 그리워도 이 순간이 좋다. 찾으려는 노력과 흘려보내는 시간이 좋다. 또 다른 단계에 서면 그때 또다시 새로운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욕과 무기력이 교차하는 생의 스릴을 맛보게 될 테니까. 


다시 앉은 컴퓨터 앞이 겨울의 따뜻한 화로 옆이라도 되는 양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오! 찾았다. 쓸 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인터넷 속의 이야기뿐 아니라 내 눈앞에서 열리기를 기다리는 책 몇 권도 펴보아야겠지.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생각이 널을 뛴다. 아침쯤이야 굶으면 어떤가.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우선 어제 읽었던 수백 년 전의 서양 시 한 구절을 적어본다. ‘사랑은 보이지 않게 타오르는 불이에요’ 오백 년 전의 시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구나. 도대체 사람이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은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말과 글에 감탄하면서도 나의 손은 여전히 컴퓨터 자판에 머물러 있다. 가끔은 시작하기가 두렵기도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내가 아는 범위에서 솔직하게 남을 배려하며 쓴 글이 누구에게 해가 된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도 용기를 내본다. 


밖에서 조용히(?) 매미 소리가 들려온다. 그 시끄럽던 매미들은 멸종했는가? 왜 저리 힘없이 울고 있을까? 약해진 청력은 깨닫지 못하고 조용한 매미를 탓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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