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을 훔치다

by 최용훈

아침저녁으로 제법 한기를 느낀다. 부지불식간에 계절이 바뀌었다. 마치 깨닫지 못한 순간 인생의 가을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삶과 일의 무게에 눌려 쫓기듯 시간의 노예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는 또 다른 구속이다. 그래서 또다시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무언가에 자신을 얽매려 한다. 그리곤 다시 그 사슬에서 도망친다. 영원한 도돌이표다. 숙명적인 계절의 순환처럼 말이다.


1970년대는 아름다웠다. 젊음의 열정으로 몰두하고 사랑하고 번민했다. 80년대는 불안과 변화의 시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의심했다. 90년대에는 수없이 계획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첫 20년은... 바쁘고, 충만했고, 외로웠지만 성숙했다. 그렇게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계절처럼 인생이 바뀌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외롭지는 않지만 마치 술병에 든 나머지 술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기분이다. 낡은 사진첩을 넘기듯 지난 일을 떠올리고, 날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한꺼번에 철학자가 되고, 주변이 보이고 사람을 알게 될지는 몰랐다. 이토록 웃기고, 조롱받아 마땅한 변태(變態)를 겪을 줄은 미처 몰랐다. ‘풋내기 시인들은 베끼지만, 노회한 시인들은 훔친다.’ 내가 좋아했던 T. S. 엘리엇 선생의 말이다. 젊은 시절 난 열심히 흉내 냈고 이제 나이 들자 자꾸 남의 것을 훔치려 든다. 그게 편해서일 거다. 어설프게 만드는 것보다 훔치는 것이 편하니까.


한때 나는 학자인양 했다. 수많은 강연과 학회에서의 발표.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흥분된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지루한 일인지. 이제 다른 이들의 눈치 보지 않고 사실을 말해도 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그때 나는 엘리엇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양복 속에 조끼를 껴입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직접 내린 커피를 러시아 산 투박한 머그잔에 담아 나를 흠모했던, 흠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젊은 제자들에게 건네곤 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하는 말은 과연 나의 말일까?’


“나는 내 영혼에게 말했다. 희망 없이 조용히 앉아 기다리라고. 왜냐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뿐이니까. 사랑 없이 기다리라고. 사랑은 그릇된 것에 대한 사랑이니까. 여전히 믿음은 남아있다 해도 믿음과 사랑은 여전히 기다림 속에 있는 것이니까. 생각 없이 기다리라고. 아직 생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둠은 빛이 되고 고요함이 춤추게 될 것이라고.”


엘리엇 선생은 참 글을 잘 쓴다. 하긴 노벨상도 받은 뛰어난 시인이자 이론가였으니까. 더욱이 그의 사상은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논쟁적이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희망, 사랑, 믿음, 생각... 추상은 결코 구상을 이기지 못한다. 잠시 실체를 가릴 수는 있지만 우리의 허튼 생각을 파편화할 뿐이니까. 그러니 구상화 같은 삶을 살아낼 수밖에. 관념은 사변적이 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섹스 중의 땀방울같은 적나라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연극이 영화를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난 여전히 피카소보다는 르누아르가 좋으니까. 그래서 추상의 늪을 건너며 나는 기다릴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언젠가는 어둠이 걷히고 말없던 내 영혼이 춤을 추겠지.


“우리는 매일 서로 죽어간다. 타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을 알고 있던 순간의 기억일 뿐이다. 그들은 변화한다. 그들과 우리가 같은 척하는 것은 언젠가는 깨어질 편리한 사회적 관습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만남은 낯선 이들과의 만남임을.” (엘리엇)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그래. 우리는 영원히 타인일 뿐이다. 서로를 모르는 타인들. 언젠가 만났다가 스쳐 지나간 무심한 환영들. 주변이 고요할 때 비로소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존재는 혼자임을 깨닫는다. 엘리엇의 말대로 ‘책과 고양이들. 그래서 인생은 좋은 것’ 임을. 짧은 생애의 순간순간은 그저 다음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열어둔 창문으로 스치는 공기가 선뜻하다. 오늘은 누군가를 만나야겠다. 알았지만 모르는 타인이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운’ 가을이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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