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세월이 쌓이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모양이다. 말도 글도 내일보다는 어제를 되돌아보게 된다.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기억이 많기 때문일까? 후회나 미련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현재는 없다. 우리가 현재라고 느끼는 매 순간이 순식간에 과거의 영역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래뿐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끔 뒤를 돌아보는 내 모습에, 내 말과 글에 회의(懷疑)가 든다.
과거는 덮어질 수도 되살릴 수도 없다. 짙은 물감으로 덧칠할 수 있는 그림과는 다르다. 떠나버린 기차를 플랫폼에서 바라보는 것이 과거이다. 호수에 던진 돌은 파문을 남기지만 가라앉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 흔적마저 짧은 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늘 허망하다. 애처롭고 쓸쓸하다. 대책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가지를 붙든 철 지난 나뭇잎 같다. 가을의 말랑한 상념이 겨울의 한파를 어찌 견디겠는가.
‘과거에 살지 말고, 미래를 꿈꾸지 말고 현재에 살라.’ 하지만 현재에 사는 것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헛된 환상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현재에 사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과거를 쫓아 거꾸로 걷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발걸음은 앞으로, 미래로 내디뎌야 한다. 오늘을 딛고 내일을 향해야 한다. 과거는 눈앞에 없어 아름답고, 현재는 미처 붙잡기 전에 사라져서 힘들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불안하다. 하지만 오지 않을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불안 속에서라도 꿈꾸지 않는다면 시간은, 세월은 허공을 밟고 날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냉소적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성자와 죄인의 유일한 차이: 성자는 과거가 있고, 죄인은 미래가 있다.” 성자가 걸어온 과거의 길은 가르침이 되고, 죄인이 내딛을 발걸음은 미래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 없는 과거, 아름다운 미래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릇되지 않은 과거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성자는 드물 수밖에.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는 죄인이 될 수밖에. 하지만 성자의 과거가 뭐 그리 대단한가? 다 지난 일인데. 어차피 미래를 내딛는 것은 모험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모두 이미 죄인이다.
과거는 변하지 않고 미래는 나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불확실한 현재의 성실함이 반드시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니 결국 우리의 삶은 기댈 곳이 없는 건가? 갑자기 비관주의자가 된다. 하지만 ‘비관주의는 감정에 있고, 낙관주의는 의지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과거의 감상을 털어내고 미래를 향한 의지를 불태워야 하겠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잘 가시오, 지난날의 떨어진 꽃잎들
꽃은 시들었으나 그대 여전히 남아있구려
발에 짓밟힌 길, 그 모퉁이 따라
기억의 바람이 스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미국의 여성시인 루비 아처의 짧은 시. 땅에 떨어져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꽃잎, 들러붙어 지울 수 없는 수많은 기억들. 이제 작별을 해야겠다. 기억의 바람이 아닌 의지의 바람, 내일에 대한 기대의 바람으로 그것들을 털어버려야지. 길지 않은 인생 되돌아봐서 무슨 소용?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외로워 말고, 슬퍼 말고, 그리워 말고 미래를 향해 걸음을 내딛자. 나아가고 또 나아가자. 그것이 진정 오늘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과거의 껍질을 벗기려 하지 말고 내일의 씨앗을 뿌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