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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보다는 후회만 남는...

by 최용훈

명동 성당에서 코스모스 백화점까지의 길은 수만 가지 기억의 소로였어.

타임다방 앞에 쭈그려 앉은 굶주린 젊은 백수들이 미니스커트 아래 벗은 다리를

힐끔 거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지. 그때도 성당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어.

결혼식을 빙자한 시국선언이 난무하던 촌스러운 민주화의 성지였다나.

로열 호텔 지하의 나이트클럽은 자이언트 고고장보다는 조금 점잖았지만

블루스 타임이 되면 오히려 더 수상쩍었다니까.

오비스 캐빈은 시끄럽기만 했지 역사가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넓고 밝았어.

열 평 남짓한 락 다방이야말로 자유분방의 극치였다고. 대마초에 취한

남자와 여자들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지. 귀를 찢는 헤비메탈의 미쳐버린 일렉트릭이

그들의 신음소리를 모두 삼켜버리고 말았으니까.

AFKN의 아메리칸 탑 포티보다 더 진한 메탈을 먼저 틀어야 했어. 그곳에 가야

진정으로 퇴폐적인 히피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중앙극장 옆 길모퉁이 와이셔츠 가게에는 정말 매력적인 아가씨가 있었어.

슬쩍 눈을 흘기며 고개를 돌릴 때는 솟아오르는 욕망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필하모니에도 갔었지. 국문과 여학생이었지 아마. 클래식은 너무 지루했어.

그 여자애는 변신을 읽고 있었어. 읽고 있는 척했는지도 모르지. 그날 밤

사직공원에서 서툰 키스에 몸을 떨고 있었으니까.

청자다방, 본전다방 그리고 세련된 이름의 썬 커피숍...

내가 다니던 명동 길은 그 이전의 낭만이나 예술적 퇴폐보다는

겉멋만 든 가짜 히피들의 방탕함이 더 짙게 묻어있었어.

장발에 청바지 통기타... 르네쌍스, 르시랑스... 그 가볍고 어둡고 헤매던 시절의 먹먹한 기억.

진고개 신사들의 뒤를 이은 명동의 날라리들은 모두 가짜 세월을 살았지.

새벽 다방에서 쪽잠을 자고, 할리우드 극장 뒤 싸구려 해장국 한 그릇에 허기를 채우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버스비를 세던 가짜 반항아들, 지금은 혹시 파고다 공원에 모여 있을까.

그리움보다는 후회만 남는 그 시절의 가짜 젊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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