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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9. 2020

역사 - 과거를 통해 보는 현재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

역사의 패러독스    

  

인류의 역사는 이브의 거역, 카인의 살인으로 시작된 배반의 역사인가. 타락과 죄악의 기록이 역사라면, 그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challenge & response)으로 본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는 전쟁과 질병과 기아 그리고 권력자들의 무자비한 살육의 기록들을 살피며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에 빠진다. 그래서 이렇게 개탄한다. “신은, 존재한다면, 전능하지 않고, 전능하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전복된 호화 여객선 승객들의 목숨을 건 탈출을 그리고 있다. 10여 명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이끌고 뒤집힌 배의 밑바닥까지 도달한 목사는 뜨거운 김을 내뿜는 해치에 맨손으로 매달려 절규한다. “하나님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제발 방해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E. H. 카(E. H. 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가 나누고 있는 대화이다.”라고 말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의 손에 의해 써져 후세의 사람들에게 과거를 대면하게 한다. 과연 과거는 현재를 보는 거울이 될 수 있는가. 역사 속의 인물들은 기록된 대로 판단해도 좋은 것인가. 역사를 다루는 문학은 더 큰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오늘날 실제로 볼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과거의 기록이 과연 진실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의 왜곡    

  

16세기 영국사에 등장하는 폭군 리처드 3세(Richard III)의 유골이 2012년 영국의 레스터 대학 연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옛 교회 부지였던 레스터 시의회 건물 주차장 지하에서 발견된 유골은 후손의 DNA와 일치함으로써 리처드 3세의 유해로 판명되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곱사등’으로 묘사된 것처럼 발견된 유골도 등뼈가 휘어있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영국사에서 그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폭군이다. 그는 영국 왕가의 왕권 다툼이었던 장미전쟁에서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하던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Henry VII)에게 패배하여 전쟁터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집안이었던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하였다. 연구팀에 의하면 유골의 머리 쪽에 단검에 의해 강한 충격을 받은 흔적이 있으며 척추에서는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죽은 후에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이 수의에도 싸이지 않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극작을 했던 시대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이었고, 헨리 7세가 여왕의 조부였음을 생각할 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그가 어떻게 그려졌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역사가들은 그가 조카인 에드워드 5세(Edward V)를 단순히 유폐만 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폭군 이미지는 승자들에 의한 왜곡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한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던 루이 16세(Louis X VI)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다. 14세에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에 와 4년 뒤 왕비가 된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의 왕족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고,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꾀했다는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정치와 관계없이 왕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사치스러운 삶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던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나”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의 당사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태어나서 궁정생활 밖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공주가 실제로 반혁명을 꾀할만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과연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것처럼 사치스럽고 방탕한 인물이었을까? 역사에 의해 정형화된 수많은 인물들의 개별적 삶에 대해 과연 우리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현재와 과거의 만남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라고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와 과거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과거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과거를 외면하고 살 수 없다. 또한 역사라는 과거를 올바른 시각에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릇된 과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된 역사가 왜곡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역사의 기록은 인류에게 던져지는 과거의 목소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고대 페르시아 전쟁을 묘사한 ‘역사’(Historiae)라는 책을 저술한다. 신에 대한 높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인간의 오만이 신의 처벌을 초래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페르시아가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것은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의 오만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에게는 몰락에 이르게 되는 ‘성격적 결함’ 혹은 ‘비극적 결함’(hamartia)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결함을 ‘오만함’(pride)라고 생각하였다. 그 ‘오만함’이라는 인간의 약점이 역사의 기록 속에서 지적되고 있다. 역사는 그렇듯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 인간을 탐색한다. 간혹 왜곡되고, 승자에 대한 아첨으로 퇴색하지만 역사는 인간의 모습을 과거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비극적 역사를 통해 배운 대표적인 민족이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그들의 노예로 전락한다. 모세에 의해 이집트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또 다른 고대 제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자 그들은 자신의 땅을 등지고 2,000년의 세월을 조국 없는 민족으로 떠돌게 된다. 유태인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이다. 로마의 학정을 피해 유럽의 각지로 흩어진 유태인들은 로마에 의해 기독교화된 유럽인들에 의해 배척당한다. 예수라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나치에 의해 죽어갔다. 그들은 더러운 쓰레기처럼 청소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잔혹한 행위가 그들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인내를 배운다. 유태인들은 그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다른 민족들,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지옥을 경험했지만, 독일인들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단 한 편의 책도 유태인들에 의해 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 상 최대의 미스터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 인고의 가치를 배우고 생존을 위한 침묵의 유전자를 내재화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미국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다른 흑인 작가들과는 달리 백인에 대한 비난이나 저항보다는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인종문제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그는 역사에 대해 대단히 통찰력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볼드윈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역사를 쓰고 있을지 모른다. 인종차별, 종교 간 갈등,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투쟁, 이 모든 것들이 현재 속의 역사이다.     

  

역사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현재 속에서 의미를 지닐 때이다. 과거의 기록물들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역사를 종교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거의 단편들이 현재와 일치되고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는 한 역사는 가치를 지닌다. 그 속에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반향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래서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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