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서사시 바가바드기타(The Bhagavadgita) 속에 '망상은 무지의 자녀'라는 표현이 나온다. 망상뿐 아니라 미신이나 편견, 어리석음 모두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그래서 19세기 미국의 개신교 목사 헨리 비처(Henry Beecher)는 '무지는 괴물들의 모태'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무지에서 오는 망상은 종종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오래전 과테말라의 마야어족 인디언 500여 명이 일본 관광객들을 공격해 두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알록달록 수가 놓아진 전통 의상을 입고 있던 인디언 아이들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야족들은 그 사진이 잡지에 실려 납치범들에 의해 이용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 '집단 광기'로 변해 잔인한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망상은 잘못된 믿음이다. 따라서 망상의 결과는 위협적이다. 망상은 우리의 심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들도 집단 히스테리 상황에서는 쉽게 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흔히 집단폭력 사태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적 같은 일을 목도하는 것 등에서 드러난다. 히틀러와 같은 선동가들은 다수의 군중들을 모아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집단적 망상에 빠지게 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한다. 아리안 족의 우월성, 유대인의 저열성이란 그릇된 믿음의 망상에 사로잡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살해한다. 인류 최대의 집단 망상이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선동가들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현대의 괴물에 의해 망상으로 이끌려 가고 있다. 눈을 뜨면 한 번의 클릭으로 무한의 세상을 만난다. 무수한 말, 말, 말들. 그 속에서 우리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가장 마음에 드는 키워드 하나를 집어 들고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착각한다. 그렇게 망상에 빠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스스로를 맡긴다. 심지어 편을 나누어 상대를 헐뜯는 모습들을 보면 집단적 망상에 빠져 드러내는 광기에 섬뜩해지기도 한다. 이제 망상은 무지가 아니라 혐오와 적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망상은 환상(illusionist)과는 다르다. 환상은 감각적 경험의 오류로 인해 발생하므로 심리적이기보다는 육체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마술의 트릭을 써서 청중들의 감각을 혼란시키는 무대 위의 마술사들을 일루셔니스트(illusionist)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환상은 믿음이나 희망 같은 것에 적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이나 직업에 대한 환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나타낸다. 사랑의 열정에 빠져 결혼이라는 현실을 망각하거나, 지나친 기대감 속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실망들은 모두 헛된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망상이 병리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환상은 실수나 오판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기 쉽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망상은 무지에서 온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 그것이 무지이다. 한때는 무지를 더 행복하고, 더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간주해 지식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등장한 '고귀한 미개인'(noble savage)이라는 개념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문명의 영향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의 타고난 미덕을 상징한다. '고귀한 미개인'에 대한 찬미는 18~19세기의 글들, 특히 장 자크 루소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의 '에밀:교육론'(Émile, ou, De l'éducation)은 전통적인 교육이 끼치는 그릇된 영향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의 자전적인 글 '참회록' (Les Confessions)에서는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다는 성선설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거짓되고 편향된 지식이 무지의 순수함을 훼손한다는 생각의 일단이다. 하지만 영국의 묘지파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그레이는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었던 이튼 학교에 관한 글에서 '무지가 행복인 곳에서는 현명함이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묘사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선과 순수함이 교육과 지식에 의해 훼손된다는 낭만적 견해는 절대적 진실이 되기 어렵다.
무지는 몰락과 비극의 씨앗이고 잘못과 거짓의 온상이 된다. 무지는 행복이 될 수 없다. 20세기 미국의 소설가 필립 윌리(Philip Wylie)는 ‘무지는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잊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지는 역사 속에 드러났던 많은 망상의 원천이 되었다. 연금술에 대한 헛된 믿음, 마녀 사냥, 점성술, 유령과 외계인 그리고 UFO까지 모든 망상의 원인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은 다 잊혔지만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인들 대부분은 사악한 무리들이 무색, 무취에 탐지조차 불가능한 아쿠아 토파나라는 물질로 식료품 상점과 상수도와 심지어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까지 독으로 오염시켰으며 그 독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악한 무리라고 지명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마녀 사냥 역시 다르지 않았고,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도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켜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했다. 오늘의 우리는 ‘도시의 전설’ 같이 꾸며진 거짓으로 대중을 미몽에, 망상에 빠지게 한다. 그리하여 집단적인 히스테리와 적개심,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을 분열시킨다. 더욱이 현대의 놀라운 정보통신 기술은 그러한 거짓을 온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퍼뜨린다. 오늘의 세계는 그렇게 거짓과 무지에 사로잡힌 ‘망상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망상과 진실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망상으로 여겨졌던 것들의 뒤에는 교묘한 책략이 있었거나 더러운 현실을 숨기려는 비열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테말라에서 일어났던 인디언들의 일본 관광객 살해 사건은 오로지 망상에 기인한 것이었을까? 현실은 달랐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어느 날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건강한 아이는 수 천 달러로 불법 입양되었고, 나이 든 아이들은 노예로, 창녀로 팔려갔다. 마야의 인디언들은 망상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전한 사회 구조에 의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기 방어를 위해 스스로의 법칙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망상에 사로잡힌 것보다 더욱 위험하고 더욱 비인간적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망상에 빠져있는가. 과연 그것은 망상일까 아니면 가려진 진실일까? 두려운 것은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음모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망상으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망상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다. 망상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불안하고, 비극적인 현실이다. 끝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꾸며진 거짓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불확실한 믿음이나 이익을 위해 진위와 관계없이 어느 한쪽을 붙들고 그것이 자신의 주의이고 신념이라는 망상에 빠진다. 그러나 오늘의 이 모든 환상 같은 현실을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불확실하다. 진정한 망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 간의 이해 없이, 무지에서 오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편히 살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골딩이 자신의 소설 ‘눈에 보이는 어둠’(Drakness Visible)에서 묘사하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망상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
“망할 놈의 인류, 우리는 모두 미쳤다. 우리는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망상과 혼란에 쌓여있다. 우리는 모두 미쳤다. 그리고 고독의 감옥에 갇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