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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20. 2020

딜레마, 선택의 오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문학 속에 그려진 햄릿의 딜레마이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딜레마의 연속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당혹감, 그것이 딜레마이다. 돈과 명예, 사랑과 의무,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딜레마의 문제는 선택을 위한 판단의 문제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선택과 판단    

  

도덕적 딜레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과거의 철학과 윤리학으로부터 해답을 얻기 어렵다. 언제나 두 개의 모순되는 답을 정하고 그것의 선택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비비 원숭이의 심장을 이식한 것은 옳은 일인가. 아이는 불과 며칠을 더 살았을 뿐인데, 인간을 실험용 모르모트처럼 사용할 수 있는가?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종(種)의 혼란은 또 어찌할 것인가. 인간을 위해 동물들은 언제나 희생되어도 좋은 것인가. 프랑스 현대 철학자 오지앙(Ruwen Ogien)의 “딜레마‘(L'influence de l'odeur des croissants chauds sur la bonte humaine)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는 또한 ‘기게스의 반지’(Gyges Ring)라는 서양철학의 고전적 딜레마를 소개한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글라우콘은 목동 기게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목동은 우연히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반지를 발견한다. 반지에 달린 보석을 돌려 모습을 보이게도, 보이지 않게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법의 힘을 얻게 되자 바로 궁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왕비의 침소를 침범해 그녀와 정을 통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글라우콘이 말한 반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힘을 얻었을 때 인간의 심성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를 질문한다. 절대적인 힘과 그 힘의 부당한 사용에 대한 딜레마는 지극히 예언적이다. 오늘날 원자력의 발견은 인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또한 인류의 파멸 가능성을 높인다. 과연 우리는 지구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원자력의 개발을 계속해야 하는가. 인간은 원자력이라는 마법의 반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역설(Paradox)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역설이다. 약 3,300여 년 전 테세우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물리치고 크레타 섬에서 타고 돌아온 배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테네 인들은 이 배가 썩어가자 낡은 널빤지들을 제거하고 새 목재를 그 자리에 바꿔 가면서 무려 1천 년을 보존한다. 기원후 1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이 배가 다른 조각들로 완전히 바뀌었다면 과연 '그것은 같은 배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와 더불어 17세기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한발 더 나아가 “버려진 본래의 낡은 널빤지들을 모아 또 하나의 배를 만든다면 어느 배가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라는 새로운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테세우스의 배’ 또는 ‘테세우스 패러독스’ (Theseus’ Paradox)는 하나의 물체가 그것을 구성하는 부품이 모두 바꾸어도 그것이 사실상 같은 물체냐 하는 역설적인 질문을 일컫는 말이다. 이 역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딜레마와 마주치게 한다. 테세우스의 배가 우리의 두뇌에 적용된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인간의 뇌가 낡아서 이를 구성하는 뇌세포를 바꾼다면 ’나‘라는 영혼은 그대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같은 나일까. 오늘날의 과학은 과거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생명체의 합성에 근접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20년 경이면 원시 생명체의 합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언젠가 뇌세포를 합성해내는 것이 가능해지면, 인간은 병들거나 늙어가는 뇌세포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테세우스의 배처럼 전혀 다른 세포로 이루어진 나 자신을, 나의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선택의 오류     

  

딜레마에 빠진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순간 최악의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하나의 범죄에 연루된 두 죄수의 이야기가 있다. 경찰은 유죄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을 분리 취조하면서 거래를 제안한다. 만약 한 명이 상대를 기소하는데 유리한 증언을 하고 다른 한 명이 침묵을 지키면 밀고한 자는 풀려나지만 침묵을 지킨 공범자는 10년 형을 받는다. 둘 다 침묵하면 1년, 둘 다 자백하면 각각 5년 형을 받는다. 대부분의 경우 죄수들은 폭로를 택하고 5년 형을 받는다. ‘죄수의 딜레마’이다. 상대에 대한 의심과 이기심의 결과이다. ‘치킨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1955년에 제작된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에 나와 주목을 끌었던 황당한 게임이다. 각자 자신의 차를 타고 절벽을 향해 달리다가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에 차에서 뛰어내리는 게임이다. 먼저 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겁쟁이이고 게임의 패자가 된다. 둘 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딜레마는 언제나 선택의 오류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텍사스 대학 오스틴 캠퍼스 종신 철학교수인 폴 우드러프(Paul Woodruff)는 ‘아이아스의 딜레마’(The Ajax dilemma)에서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언급한다. 트로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죽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가 경쟁한다. 그리스 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이아스 보다는 지혜와 용기를 갖춘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결국 갑옷은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간다. 이에 분개한 아이아스는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아테나신이 그의 정신을 혼란시켜 가축들을 그들로 착각하게 한다. 그 가축들을 죽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이아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는 적절치 못한 보상이 초래한 아이아스 개인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갑옷의 주인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가멤논의 딜레마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딜레마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 영웅을 수치심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이끌고 만다. 이 경우 과연 현명한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의 선택적 딜레마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드러프 교수는 지혜로운 리더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없다. 어차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아가멤논의 현명한 처신이다. 그는 두 사람의 업적을 아테네의 모든 국민과 공유하고, 아이아스로 하여금 오디세우스에게 패배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하는 배려의 현명함을 발휘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딜레마는 논리와 정당한 해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오류를 최소화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선택을 통해 상처를 받는 누군가에 대한 배려와 또 다른 보상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딜레마     

  

딜레마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발생한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증오하지만 분노를 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는다. 상처 받기가 두려워서, 서로 영원히 적이 될까 걱정해 언제나 거짓된 관계의 가면을 쓰고 산다. 타인에 대한 감정의 표출이 억제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거나 접근하지 못한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를 ‘고슴도치 딜레마’라 부른다. 그가 쓴 우화 속에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기대어 서로 온기를 나누려던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나온다. 그러나 그 둘은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침에 찔리고, 서로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두 마리 고슴도치는 오늘의 우리와 너무도 닮아있다. 그렇게 우리는 추워도 서로의 침에 찔릴까 봐 다가서지 못하는 고슴도치가 된다. 그리고 이 어색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멀리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에서 인간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음식과 관련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먹을 것을 발견할 때마다 과연 그것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행복한 고민인가?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은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인류 최대의 딜레마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또다시 답이 없는 딜레마들과 마주친다. 도덕적 딜레마, 관계의 딜레마, 그리고 선택의 강요와 그에 따른 오류들로 우리의 삶은 마치 외줄을 타는 듯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말에 새삼 전율한다. “나는 제3차 세계대전에 어떤 무기가 동원될지 모른다. 하지만 제4차 세계대전에선 어떤 무기가 동원될지 단언할 수 있다.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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