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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an 14. 2021

향기 없는 향기 (1)

향기의 힘/ 사람의 향기


향기는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봄의 새싹, 들꽃의 향기는 생명의 탄생을, 한 여름 녹음의 숨결은 짙은 열정을, 가을의 낙엽 태우는 냄새는 아련한 고향의 들녘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겨울조차도 화로에 익어가는 군밤의 정겨운 향기를 가지고 있다. 향기로 떠올리는 수많은 추억은 그대로 우리의 삶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미소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향기는 우리 자신이 된다.     


향기의 힘     


“향기는 말이나 외모, 감정이나 의지보다 더 큰 설득의 힘을 가지고 있지. 그 힘은 결코 막을 수가 없어. 향기는 호흡과도 같이 우리의 폐로 들어와 우리를 가득 채우고 그것에 흠뻑 빠지게 하니까. 벗어날 도리가 없는 거야.”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198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부적인 후각을 가진 소설의 주인공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여자들의 체취를 이용해 최고의 향수를 만들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너무도 그로테스크하다. 그의 향기에 도취된 부랑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향수가 뿌려진 그의 온몸을 뜯어먹는다. 인위적인 향기가 만들어낸 극단적인 결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그루누이의 말처럼 향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연구에 따르면 감정적 행위의 75%는 후각에 의해 촉발된다고 한다. 또한 향기와 함께 형성된 기억은 그렇지 않은 기억에 비해 훨씬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향기 마케팅’이 유행했다. 아이스크림 판매업체 배스킨라빈스는 매점 주변에 아이스크림 향을 뿌려 상당한 매출의 증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스타벅스 커피도 향기 마케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90년대 초, 스타벅스는 아메리칸 항공과 제휴하고 승객이 탑승하기 전에 기내에서 커피를 끓였고, 그 향으로 승객들의 관심을 끌어 당시 시애틀 지역에만 알려져 있던 브랜드를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감각을 지배하는 향기의 힘이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후각과 생명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도하였다. 미국 시카고 대학 연구팀에 의해 57~85세 사이의 3000명을 상대로 후각 정도를 측정하는 테스트를 시행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후각 기능이 떨어진 피실험자 가운데 39%가 5년 이내에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후각 기능이 정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약 10%만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향기 없는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우리의 생명을 약화시키는 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다. 그윽한 지혜의 향기, 향긋한 꽃의 향기, 서늘한 바람의 향기. 그러나 어떠한 향기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향기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자신만의 향기를 지닌다. 나만의 향기!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가. 당신 자신도 다른 사람을 취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향기 속에 태어나고 자란다. 어머니의 품에서 맡았던 따뜻하고 감미로운 향기, 그것은 사랑의 향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슴 벅찬 향기에 대한 기억을 잊고 산다. 그리고 문득 잊었던 그 향기를 떠올리고 그것을 그리워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셸리는 그 향기가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노래한다. 꽃이 시든 후 잔향으로 남아있는 향기, 우리에게도 그런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있다.     


“향기는 아름다운 바이올렛 꽃이 시들고 나서야

그것이 깨워놓은 감각 속에 살아납니다. “    


모든 향기는 우리의 추억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셸리의 말처럼 우리는 꽃이 시들고 나서야 향기를 느끼게 된다. 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나서야 고마움을,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밤하늘 별빛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백사장을 걸으며 맡았던 바다 내음, 함께 걷다 우연히 맞닿은 어깨너머로 그녀의 머리칼에서 풍겨오던 비누 향, 외할머니가 지핀 군불에서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풍기던 그윽한 장작 향기, 또 가마솥에서 익어가는 구수한 밥 냄새까지... 그 모든 향기가 아직 가슴속에, 추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 향기와 함께 있던 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향기는 추억이다. 끝없이 추억을 자극하고, 그것을 되살린다. 그래서 향기는 눈물이다. 그리움을 부추겨 까닭 모를 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향기는 사랑이다. 기억하는 모든 향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향기 전문가 송인갑은 ‘후각을 열다’라는 책에서 향기에 대해, 그것을 느끼는 후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억해내지 않아도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후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향기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기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 느껴야 한다. 그렇게 향기는 추억과 그리움과 사랑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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