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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05. 2021

혼자인데 왜, 가득하지?

이경옥 시인

혼자인데 왜, 가득하지

                   이경옥    


적막을 펴서 거실에 깔아요

혼자인 밤이에요

세 개의 방문을 열어 놓고 빈방에서 노는

적요도 거실로 불러요    


남편은 출장을 갔고요

큰딸은 여행을, 작은딸은 세미나

떠난 사람들이 혼자 남을 날 위해

걱정하는 말들을 카톡으로 날려요    


하, 하, 하,

그대들이여! 별걱정 다하십니다

미치도록 재미있는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 줄게요    


일단 거실 블라인드를 올려요

창문을 열고 옅게 돋아난 조각달을 데려와요

읽고 싶은 책으로 머리맡에 성을 쌓아요

그리고 외간 남자를 곧바로 불러들여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좋겠어요    


큰 댓 자로 누우면

아, 자유, 자유, 자유,

자유는 무엇으로 짠 기름이길래

이리 고소할까요

적막과 적요와 고요를 섞고 자유를 듬뿍 뿌려요

참깨보다 몇 배나 더 고소해요

온몸으로 퍼지는 가득함이 근사합니다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돌아오는 날이 길어져도

절대 그대들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I Am All Alone,

But Why do I Feel Filled-up?    

                      by Lee, Kyong-ok


I spread silence on the livingroom floor.

Tonight I am all alone.

Opening the doors of the three rooms,

I’m calling in loneliness playing in an empty room.      


My husband is out of town

My first daughter in travels, my second one for seminar

They, out there, are sending me text messages

Worrying me, left alone.    


Ha, Ha, Ha

Don’t! Don’t worry.

I will show you

How cheerfully I can play alone.     


First, pull a blind open

Open the window and bring in the lightly-rising fresh moon,

Build up a castle with the books I wish to read

And soon get in a man.

Better to have Luciano Pavarotti.    


Lying at full length on the floor,

Ah, I feel free, free, free.

From what is the oil of freedom

So sweet and savory, squeezed?

Mix silence, loneliness and calmness,

Put much freedom on it,

And You will have something far sweeter than sesame oil

Fully permeating across my whole body.  


My beloved!

I will never blame you all

For being too late in coming back.     


1990년대 중반 극단 실험극장에서 ‘셜리 밸런타인’이라는 모노드라마가 공연되었습니다. 후배의 부탁으로 필자가 번역한 그 작품은 실험극장의 대표였던 김동훈 선생의 연출로 배우 손숙 선생이 출연하였습니다. 그 공연이 끝난 후 얼마 안 되어 김동훈 선생이 세상을 뜨셨으니 그만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셜리라는 이름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고립되고 외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자유를 찾는다는 얘기입니다. 남편과 상의 없이 지중해의 섬으로 떠난 그녀는 그곳에서 불안감 속에서도 작은 일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해변의 작은 노천카페에 앉아 자신을 찾아오는 남편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안녕하세요. 전 셜리예요. 와인  잔 하시겠어요?”     


이경옥 시인의 시를 마주한 순간 오래 잊혔던 그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잔뜩 부풀었던 젊은 시절이었죠. 그때만 해도 이 땅에서 아내로, 어머니로 사는 것이 지금과는 또 달랐었죠.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벌써 25년도 넘은 옛날이니까요. 21세기에는 '여성성'이 키워드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하고 여성을 대하는 남성들의 사고방식도 많이 달라졌죠. 요즘의 젊은 아빠들을 볼 때마다 일찍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시작한 게 다행(?)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제 장성해 결혼을 하고 아내로 어머니로 사는 딸아이를 보면 여전히 짠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 여전히 예전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시인의 시는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 같아요. 식구들이 집을 비운 그 순간, 연극처럼 화자(話者)인 그녀의 무대가 열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자유의 달콤함은 가족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느낄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제 사랑스러운 그녀들에게 조금 자유를 주시지요. 홀로 적막과 고요를 벗 삼고, 달빛을 불러들여 아름다운 시와 함께 ‘혼자 놀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파바로티도 불러 노래 한마디 하라고 하고요. 우리 남자들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셜리 밸런타인은 2000년 대 중반쯤에 극단 로뎀의 하상길 대표 연출, 김혜자 선생 출연으로 재공연 되었습니다. 모두 그리운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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