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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12. 2021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진정한 사랑

그날 아침 병원은 무척 분주했습니다. 아마 8시 30분쯤 되었을 겁니다. 그때 80대의 노인 한 분이 병원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엄지손가락에 꿰맨 실밥을 풀러 오셨지요. 그리고는 9시에 약속이 있으니 서둘러 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노인께 앉기를 청하고 그의 혈압을 체크했습니다. 아무래도 상처를 살피고 실밥을 풀어 다시 붕대를 감으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았죠. 마침 그 시간에는 예약 환자가 없었기에 나는 직접 그분을 치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간호사에게 필요한 기구를 가져오게 하고는 그의 상처를 살폈습니다. 잘 아물었더군요.     


노인을 치료하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9시 약속이 누구와의 약속인지를 물었죠. 노인은 요양원에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아내는 얼마 전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밥을 다 풀고 그에게 다시 물었죠.     


“부인께서 선생님이 늦으시면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네요.”     


내 질문에 그는 아내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된 지 5년이 지났다고요. 내가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아내분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시는데도 매일 아침 요양원에 가시나요?”     


그러자 그는 미소와 함께 내 손을 토닥이며 말했어요.     


“의사 양반, 아내는 날 알아보지 못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잖소.”    


한 의사의 이 이야기를 읽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이라는 60대 중반을 넘기면서 언제부터인가 죽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도 마음은 여전한데 가끔 불편한 제 안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죽을 때 가족들 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요양원에 계셨던 어른들을 바라보며 인생이 무엇일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저분은 언제 때의 자신으로 살고 계시는 걸까, 그렇듯 무심하게 무상한 세월을 되돌아보기도 했었죠. 아직 글 속의 노인 얘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마음의 한 조각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몇 년 전 톨스토이에 관한 강연에서 그가 자신의 아내와 겪었던 갈등, 그리고 죽음을 맞기 얼마 전의 가출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악필로 써놓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원고를 무려 여섯 번이나 손으로 옮겨 쓴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소피아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부부의 삶은 그런 것이라고, 결혼 후 사랑이 사라졌을 때는 사랑했던 오래 전의 추억으로 사는 것일지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랑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사랑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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