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Mar 21. 2021

전혜린이 쓰지 않은 시

배신당한 그리움

그리움 

        전혜린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A Yearning 

           by Jeon, Hye-rin     


Only distance never makes me miss you. 

However close to me you were, 

Never enough were you near to me.

Closer and closer did I wish to be to you

Not only in distance but also in awareness.

An irresistible yearning for you.      


배반

       전혜린    


내 눈처럼 마음속처럼

암담했던 저녁 

내 생각은 줄달음질 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기정사실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확증된 일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그때 나는 내 의식이 

내 옆에서 소리를 죽이면서 

우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어떤 저녁에.   

  

Betrayal 

         by Jeon Hye-rin     


In the evening

Gloomy like my eyes and mind

My thought ran along. 

‘It cannot be so. It cannot be so.’ 

Fait accompli it was but 

‘It cannot be so.’ 

Done deal it was but   

‘It cannot be so.’ 

Then I heard my consciousness 

Crying in a whisper beside me.

In a certain evening.      


전혜린의 시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냥 한 여인이 어느 날 느낀 애절한 감정이라 생각해주세요. 전혜린의 삶은 너무 어둡고 짧아서 두 편의 시로 그녀의 숨 막히는 의식을, 분열적인 사랑의 방황을 묘사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녀의 고통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유리병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알고 시를 읽으면 결국 그녀의 애타는 삶에 대한 기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모르는 한 여인의 눈물 젖은 고백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었던 슬픈 그리움이 여전히 아름답게 빛날 때, ‘그럴 리 없어’라는 배신의 폭풍이 가냘픈 한 여인을 휩쓸고 갔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배신당한 그리움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립지 않은 순간이 있습니까? 배신을 겪은 어떤 저녁에 주저앉아 울어본 적이 없던 가요? 그렇게 간절한 그리움에 배신당했던 그 날카로운 기억을 시 속에서 다시 느껴보세요. 위의 시는 전혜린의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도 달릴 수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