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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5. 2021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이육사, 광야

광야(廣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A Wilderness 

         by Lee, Yook-sa     


In the far-off days 

The sky may have opened,

With the sound of a cock crowing heard somewhere.      


All the mountains,

Rushing away in admiration of the sea,

Never dared to trespass on this place.      


Rapidly recurring seasons 

Would come and go in endless time and tide

And the large river opened its way at last.      


Now that it snows

And the fragrance of plum blossoms spreads alone,

Let me sow the seeds of my poor songs.     


In remote days to come

When a superman rides on a white horse,

I will call him bitterly in this wilderness.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산하는 여전하던가! 사람은 간 곳 없고 사연은 흘러도, 그곳의 기억은 여전한 것을. 가슴에 품었던 그 모든 꿈들조차 희미하건만 광야에 선 시인은 어제 같은 오늘에 가슴이 벅차다. 이곳이었지. 따뜻했지만 아팠던 그 모든 추억들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이 광야에 왜 이제 나 홀로 섰는가. 시간과 함께 흐르던 하천은 강물이 되고, 여전히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도 아련한 매화꽃 향기를 맡는다. 흥얼거리는 옛 노래에 어렴풋이 섞여 나오는 나의 청춘,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언젠가 오려나, 백마 탄 나의 영웅. 이 외로운 광야에서 홀로 기다리며 그를 부른다.     


시는 시대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시절, 시인들의 시는 잃어버린 조국의 산하와 사람들을 그리워하죠. 이육사의 시 역시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의 외로움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적 상황을 느끼게 합니다.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그 흐름 속의 변화와 그 변화 속에 남겨진 변함없는 그리움.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 믿습니다. 혼자 남겨진 불안 속에서도 외쳐 부르는 내일의 초인에 대한 기다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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