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애야, 얼렁 와 금 캐러 가자
한상림 : 늙은 광부
늙은 광부
한상림
그는 날마다 노다지를 캐러 간다
큰 애야, 얼렁 와 금 캐러 가자
갱도를 빠져나오지 못한 석탄 같은 시간의 촉수
정지된 캄캄한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끈다
곡괭이 삽질소리가 그의 심장을 조아 대면
이따금 어둠 속에서 전동차 바퀴소리 굴러오고
혼자만 아는 구석에 숨겨 둔 은밀한 금덩이를 캐러
매일 아침 치쿠호오 탄광으로 간다
고물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엇나간 재생음처럼
잃어버린 시간들이 자꾸만 노인을 끌고 다닌다.
어눌한 삶의 흐릿한 기억들
그는 아직 치쿠호오 광산 광부로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전화기에 대고 아들에게 외치는 소리
얼렁 오라니까, 뭐하냐, 금 캐러 가야지
비 그친 창살에 햇살 놀던 어느 날
치매요양원 창살에 매달린 영롱한 물방울들이
금빛으로 출렁이며 반짝거린다
흐릿한 삶의 기억 속에서
그는 아직 치쿠호오 광산 광부다
매일 아침, 전화기에 대고 아들에게 외친다
얼렁 오라니까 뭐 하녀, 금 캐러 가야지
An Old Miner
Han, Sang-rim
Everyday he goes to dig a rich vein.
Son, come now to mine for gold.
A coal-like tentacle of time still held in a tunnel,
The dim, stagnant memories
Seize his hair in darkness.
When the sounds of pickaxes and spades carve his heart
In the dark, sometimes, he hears the wheels of coal carts rolling in.
Every morning he goes to Chi-ku-ho-o Mine to dig out
The hidden gold from his secret corners.
Like the noisy sounds from an old cassette recorder,
The lost time continues dragging the old man here and there.
In the dim memories of those crude days
He is still living as a miner at Chi-ku-ho-o.
Every morning, he calls his son to shout;
Hurry up and let’s go to dig out gold.
One day when the sunlight plays on the windowpane after rain
The bright germs of water, lingering on the windows of the dementia sanitarium
Heave up and glitter like gold.
In the dim memories of life he is still a miner at Chi-ku-ho-o
Every morning, he calls his son, shouting;
Hurry up, let’s go to dig out gold.
This poem is based on the life of an old man in dementia, whose memory is still occupied by his past experience when he was forced to work in a Japanese mine called ‘Chi-ku-ho-o’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광복절 아침입니다. 이미 역사 속에 마모된 기억들이지만 불과 80 년 전만 해도 이 땅은 한 민족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타민족의 통치를 받는 수치의 세월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신민으로 잃어버린 조국의 산하에서 살던 기억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역사책의 흑백 사진 속 우리 선조들의 깊은 주름 속에, 스스로를 가둔 억압의 초상 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북간도로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져 조국의 땅을 그리던 그들의 자취는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우리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잊어야지요. 그 수난과 치욕의 질곡을 아름다운 우리의 아들딸들이 굳이 가슴속에 담고 살 이유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매 순간 새로이 써지지만 그 처연한 기억은 우리의 핏줄 속에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는 잃어버린 땅과 지워진 나의 이름을 그리워하는 나약한 민족으로 살아서는 안 되니까요. 지난 세기 이 민족은 참으로 통한의 시간 속을 헤매고 있었지요. 식민 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 독재와 희생을 강요한 산업화, 그 과정에서 심화된 부의 양극화, 이념적 갈등 등 버텨온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인 시련의 터널을 거쳐왔던 것입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있다고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겪지 못한 이 시대의 우리는 핏줄 속에 간직된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같은 민족의 동질성과 상호 간의 화해와 사랑의 정신을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시 속의 치매 노인은 척박한 일제의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그 젊은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징용으로 잃었던 시간이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 애절했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금맥을 캐는 꿈을 꿉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고향의 산천을 다시 찾을 그날을 간절히 갈망합니다. 이제 그 암흑의 광산은 고향집의 안방이 되어 그는 매일 아침 아들에게 외칩니다. 어서 일어나 금을 캐러 가자고 말입니다. 그의 억압된 기억은 잃어버린 나라, 잃어버린 청춘,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간절한 외침이 됩니다. 그리고 이 광복절 아침 우리 모두의 감춰진 기억과 결의를 일깨웁니다. 창문에 흐르는 금빛 물방울은 그의 간절한 소망과 함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영원히 빛나야 합니다.
위의 영문은 브런치 작가이신 한상림 시인이 10년 전에 출간한 시집 ‘따뜻한 쉼표’에 수록된 시를 광복절을 맞아 새로이 브런치에 올린 2021년 8월 14일 자 시의 영역입니다. 고인이 된 친구분 시아버지의 실화를 바탕으로 써진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