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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16. 202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허수경 : 공터의 사랑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 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Love in an Empty Place

                     Huh, Soo-kyong     


I stood still for long.

My love, you are rotten.     


Love leaves me and goes to you.

Love abandons you and heads for years.    


The old place for forgotten scars is bright,

Bright yet painful.     


I will go to that bright, painful place

When the ailing dream gains its years back.    


When the rainbow over the empty place

Falls ill again with the lapse of time,  


The lips of my mind with no body gained

Feel any place of grass,

Grope for the dream with no words gained.      


사랑은 본래 공허한 것이지요. 말없이 서서 지켜볼 뿐, 따지 않아 가지 위에서 썩은 과일처럼 무른 향기만을 남깁니다. 언젠가 떠나고 말 사랑, 당신 역시 놓치고 말 사랑, 사랑은 그렇게 세월 속에 흩어질 뿐입니다. 사랑의 자국은 고통스러우리만치 선명하지만 그 허한 자리 때문에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아픈 사랑의 꿈도 언젠가는 시간 속에 묻히고, 그것이 피워놓은 무지개만 아직도 뿌옇게 내 기억 안에 있습니다. 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맹세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하지만 오늘도 함께 걸었던 그 풀밭 위를 거닙니다. 사랑의 꿈은, 말은 없어도, 여전히 그 빈 터 위에 긴 환영을 뿌려놓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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