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무대에 여배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29년이었다. 그 해 프랑스의 한 극단이 런던의 블랙프라이어(Blackfriar) 극장에서 여배우가 참여한 공연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국 연극에서 여성의 역할은 노련한 배우의 도제로 훈련을 받는 젊은 남자들이 맡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여성이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은 엄청난 변화로 여겨졌다. 또한 당시의 관객들은 여성 배우의 출연에 익숙하지도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토마스 브란데라는 사람은 당시 런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객들의 경멸감을 전하고 있다. 그는 관객들이 프랑스 여배우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으며 심지어는 무대를 향해 사과를 던지기도 했다”라고 말하면서 영국의 관객은 “프랑스 여배우의 등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몇 주 후 프랑스 극단은 포춘(Fortune) 극장과 레드 불(Red Bull)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는데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관중들에게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에 궁중 연극 집행관(Master of the Revels)은 프랑스 극단의 “불운을 감안하여” 공연 허가를 위해 그들이 지불했던 돈을 되돌려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극작가 리처드 브롬(Richard Brome, 1590?~1652)의 희극 ‘궁정 거지’(The Court Beggar)에 등장하는 스트레인지러브 부인(Lady Strangelove)은 극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소년은 아주 예쁜 배우야.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 역을 해도 좋을 텐데. 이제 여배우의 등장이 제법 필요하게 됐거든.” 하지만 극에서 암시한 것이 어떤 여배우를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1633년 청교도 작가였던 윌리엄 프리네(William Prynne, 1600~1699)가 극장과 배우를 비난한 ‘히스트리오-마스틱스’(Histrio-Mastix)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모든 여자 배우(woman-actors)를 ‘괴물’이라고 낙인찍고 그들의 공연을 “뻔뻔스러운”, “수치스러운”, “여성답지 못한” 등의 형용사들을 사용해 비난하였다.
1656년 극작가 윌리엄 데버넌트(Sir William Davenant, 1606~1668)의 희곡 ‘로도스 포위공격’(Siege of Rhodes)이 유료 관객들 앞에서 공연되었는데 콜만 부인(Mrs Coleman)이 극 중 ‘이안테’(Ianthe) 역을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녀가 영국 최초의 전문 여배우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1660년에 극작가이자 연극 감독이었던 토마스 킬리그루(Thomas Killigrew, 1612~1683)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공연하면서 오셀로의 부인 데스데모나 역에 여배우를 기용한다. 당시의 평론가였던 토마스 조단(Thomas Jorda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극장에 왔어요.
새로운 소식을 전하자면, 내가 무대 의상을 입은 여성을 보게된 것이죠.
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오늘 공연을 한답니다.
여성의 가운이나 속옷을 입은 남자가 아니고 여배우가 말입니다.
...............
우리 무대의 여성 역할은 결함이 많고 체격도 크죠.
마치 여장을 한 보초병처럼 보인다니까요.
솔직히 말해 마흔에서 쉰 살 사이의 남자가
15살 먹은 계집아이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뼈대도 크고 감성은 무디기 짝이 없죠.
데스데모나를 부르면 거인이 등장을 한다니까요.
데스데모나의 역할을 한 여배우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당시 킬리그루의 주연급 여배우는 앤 마샬(Ann Marshal)이었으므로 그녀가 역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가 ‘오셀로’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극단의 제2 역이었던 마가렛 휴즈(Margaret Hughes)가 공연했을 수도 있다.
영국의 정치가였던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1633~1703)는 그 '오셀로' 공연을 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661년 1월, ‘오셀로’와 같은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베거스 부시’(Beggar’s Bush,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던 지역 명)에 대해 피프스는 그것을 “여성들이 무대에 등장한 첫 번째 공연”이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달 그는 벤 존슨(Ben Jonson, 1572~1637)의 희곡 “조용한 여인‘(The Silent Woman)에서 남자 배우 에드워드 카이너스턴(Edward Kynaston)이 여성 역을 맡은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남자 배우들이 일시에 여성의 역할에서 밀려난 것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같은 해 6월 데버넌트 극장에서 ’로도스 포위공격‘이 공연되었을 때는 데이븐포트 부인(Mrs. Davenport)이 록사나 역을 손더슨 부인(Mrs. Saunderson)이 이안테 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렇게 영국의 무대에 서서히 여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여배우에 대한 편견은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사실 여배우의 등장은 찰스 2세의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청교도 공화국 시절 그는 루이 14세의 프랑스 파리에 망명을 하고 있었다. 영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던 프랑스 궁정의 화려함에 익숙해진 그는 왕좌에 복귀하자 먼저 폐쇄되었던 연극을 재건하고 구식의 극장도 지붕과 유럽식 창문이 있는 구조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궁들로 하여금 궁정 연극에 배우로 참여토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관객들은 이전에 여성 배우들을 혐오했던 것만큼이나 남자 배우가 여성의 역을 맡는 것에 대해 반대하게 된다. 1662년 킬리그루와 데버넌트는 1660년에 받았던 연극 공연 특허권을 갱신했는데 당시의 문서에는 여성 역할을 여배우에게 맡기는 것을 허락하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1664년 킬리그루는 자신의 희극 ‘파슨의 결혼’(The Parson’s Wedding)에서 극 중 모든 여성 역할을 여배우로 채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1672년 프랜시스 보몬트(Francis Beaumont, 1584~1616)와 존 플레처(John Fletcher, 1579~1625)의 공저인 ‘필라스터’(Philaster)에도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한다. 이 공연에는 당대의 저명한 작가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1700)이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경시되는 풍조가 있었다. 하물며 여성의 경우에는 그 편견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라는 직업은 글을 읽을 수 있고 대사를 암기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여배우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17세기 말에 들어 여배우는 무대 위에서 뿐 아니라 초상화나 판화 등의 모델로서도 활약하게 되어 그들의 평판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연극은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1737년에 ‘면허 법’(Licensing Act)이 통과됨으로써 극단들이 궁정의 칙허(勅許, royal charter) 없이 공연하는 것은 불법화되었다. 이는 허가된 극장에서 공연되는 희곡들에 대한 검열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유랑극단들은 해체되었다. 이로써 공식적인 극장들이 연극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배우로서의 직업에 안정성을 얻게 된다.
18세기 중반에는 드루리 레인(Drury Lane)과 시어터 로열(Theatre Royal) 등의 극장이 런던의 연극문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극장이 위치한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거리에는 수많은 유곽(遊廓)들이 즐비했고 이로 인해 여배우들에 대한 인식이 창녀들과 혼재되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만다. 그럼에도 많은 여배우들은 사회적인 명성과 전문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여성이 남성 복장을 하는 역할이 인기를 끌게 되어 여성다운 행동의 적절성이나 여성의 신체가 무대에 드러나는 것 등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남장 여인의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 페그 워핑톤(Peg Woffington), 프란시스 아빙톤(Frances Abington), 도로시 조던(Dorothy Jordan) 등은 여러 희극에 출연해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이런 여배우들은 당대의 유명인이 되었고, 유행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의 연극 속 역할이 현실의 모습과 혼동되어 1770년 대의 대표적인 여배우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은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The Winter’s Tale)에 등장하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공주 ‘페르디타’로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Sarah Siddons(left) & Mary Robinson(right)
셰익스피어의 희극들 속에서도 남장 여인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데 ‘십이야’(The Twelfth Night)의 비올라나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의 로잘린드나 실리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여배우가 없었으므로 이러한 여성들의 역할은 주로 젊은 남성들, 특히 변성기 이전의 소년들이 주로 담당하였는데 남성이 여성 역을 맡았다가 다시 남장을 하는 모습에 대해 평론가들은 성적 정체성을 넘어 극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분과 지위의 자유로운 전환을 통한 연극의 체제 전복적 요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1768년에 설립된 왕립 예술원(The Royal Academy of Art)은 당시에 유행하던 미술이나 초상화 등을 정기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연극계의 사람들도 연극 예술의 지위를 향상하고자 유명한 여배우 사라 시돈스(Sarah Siddons)나 도로시 조던 등의 대형 초상화를 전시장에 내놓았고, 그 초상화들은 곧 고전 비극과 희극의 뮤즈들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여배우들의 고상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여배우들의 위상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그들의 초상화는 미술과 연극 예술에 대한 인식의 제고뿐 아니라 판화로 만들어져 유통됨으로써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렇듯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배우들은 영국 무대에 자신들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