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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삶의 거울

by 최용훈

독일의 시성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문학을 삶에 대한 ‘고백의 단편’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언어를 발명하고 특히 운문(verse)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뒤 문학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학은 괴테의 말처럼 인류의 고백이며 오랜 세월 동안 그려온 우리의 자화상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의 기록이다.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나와 나 사이의 갈등, 그것의 기록이 문학인 것이다.


앞으로 이 천 년 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 형식은 변할지 몰라도 그 내용은 오늘날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천 년 전의 문학이 오늘날의 문학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속 인물들의 삶의 방식은 달라져도 그들의 꿈, 그들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배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살아낼 수 없다. 문학작품은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의 모습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상상의 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문학사가 윌리엄 J. 롱(Willaim J. Long)은 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는 고대 영시 '베오울프(Beowulf)'를 예로 들면서 주인공 베오울프와 괴물들의 싸움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으로 묘사한다. 롱은 그러한 인간의 노력이야 말로 오늘날 과학정신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극복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문학은 뜬구름을 잡듯 사변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삶의 기록이다. 문학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쫓아 우리는 미로와 같은 우리의 꿈, 우리의 미래를 더듬어 찾는다. 뭉뚱그려진 삶의 신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 환희와 행복 그리고 손에 닿을 듯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삶을 재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문학 속 인간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고의 행위이다. 그래서 이 천 년을 지속한 서양의 기독교가 흔들리고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던 19세기에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널드(Mathew Arnold)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교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즐거움을 통해 삶에 교훈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달콤함에 싸인 약’ (sugar-coated pill)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하루살이처럼 죽어가는 인간을 목도한 유럽인들은 신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본질을 의심한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불안한 실존임을 확인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실존주의의 명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신에 대한 믿음, 인간의 본질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실존주의자들에게 인간은 아무런 본질도 규정되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찾기 위한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한 모습은 언덕 위로 힘들게 바위를 밀어 올리고, 꼭대기에 오르면 다시 바위를 밑으로 굴려버리는 신화 속 시시포스를 닮아있다. 그들은 평생 스스로의 본질을 찾으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본질은 없다. 그렇게 부조리한 삶이 계속된다. 부조리 문학은 이러한 인간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영국의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이렇게 묘사한다. “인생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위한 끝없는 준비이다.”(Life is a perpetual preparation for something that will never happen.) 일어나지 않을 일, 얻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 그 모습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렇게 인간은 부조리(Absurd)한 삶에, 실존적 불안 속에 빠져, 미국 시인 오든(W. H. Auden)의 시 제목처럼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에 직면하게 된다.

문학은 시대의 분위기를 규정한다. 삶의 형식을 정하고 인간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렇게 문학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포착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영국의 시인 엘리오트(T. S. Eliot)는 ‘황무지’(Waste Land)라는 시에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다. 만물이 소생하고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봄의 시작을 그는 왜 잔인하다고 했을까? 과학문명이 꽃 피고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희희낙락하는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는 척박하지만 소박하고 따뜻함이 넘쳤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다.’고 말한다. 21세기 전반, 이 시대의 감정은 무엇인가? 인간은 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의 문학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계를 자신만의 색깔로 채색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이 그려내는 진실은 개별적이다. 뫼르소도 라스콜리니코프도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부조리 문학도 실존주의 철학도 문학을 한 가지 범주로 묶지는 못한다. 문학작품 속 주인공은 자기 자신만의 역사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시대를 넘어, 보편화의 범주를 넘어, 시대의 정신을 넘어, 한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만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문학이 뒤흔들어 놓은 상상력은 규범화된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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