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헤스터 프린의 사랑
너대니얼 호손 : 주홍글씨
19세기 미국 소설가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주홍글씨’(Scarlet Letter)는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나약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였다. 17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세일럼이란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는 한 여인의 사랑과 아픔, 열망과 고뇌가 펼쳐진다. 엄격한 기독교의 교리에 집착했던 청교도 사회에서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라는 여주인공은 파란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자유분방한 사회에서도 아직 수많은 헤스터 프린들이 눈물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결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이기적인 제도가 아닐까?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낳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모두를 옭아맨다.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이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그 이름에 맞는 처신에 자신들을 가두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여전히 가족이라는 굴레 아래서 서로를,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니까.
헤스터 프린의 남편 칠링워드는 아내를 버려두고 그녀의 일탈을 방조하는 관음적인 즐거움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로 자신의 이기적인 자만심에 상처를 입자 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힌 사디스트가 된다. 칠링워드, 냉혹한 그는 아내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인 헤스터의 약점을 은밀히 즐기며 감정의 자위로 자신의 죄의식을 배설한다. 그런 사내들이 오늘 이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아내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성적 욕망도 느끼지 못하면서 아내와 다른 남자의 정념만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남자들...
사랑했던 헤스터 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칠링워드의 학대 속에 허덕이던 딤즈데일은 목사는 또 어떠한가?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서 그의 나약함과 비겁한 자기 위안은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일까? 사회가 만든 제도 그리고 타인들의 맹목적인 적개심과 비난 앞에 오늘의 남자들은 스스로 용렬한 비겁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리에 여전히 수많은 딤즈데일이 넘쳐난다.
‘주홍글씨’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헤스터 프린, 그녀뿐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사랑을 택한 여인. 맹목적인 제도와 그 속에 존재하는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편견을 대면하고 묵묵히 가슴에 ‘A’(Adultery, 간통)라는 글자를 단 여인.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에 한 번도 자신을 변명해본 적 없던 그녀. 사랑의 대가로 태어난 딸을 세상의 왜곡된 시각에서 보호해야 했던 그녀는 딸 ‘펄’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펄. 침착해야 해. 숲 속에서 벌어진 일을 언제나 장터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보다도 자신의 영혼 속에서 벌어진 가장 아름다운 일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소설 속에 묘사된 것처럼 ‘현재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더 이상 미래로부터 무언가를 빌려올 수 없었던 “ 여인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꿈꾸는 우리는 그 미래가 사실 그저 꿈속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현실의 아픔을 더 확실히 기억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들에게 헌신한다. 그것은 속죄의 의식은 아니었다. 세속의 규범이나 규율보다는 마음속에 끓어 넘치는 사랑과 연민이 더 의미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헤스터 프린은 자유롭고, 강인하고 지혜로운 한 여성의 모습만은 아니다. 그녀는 남녀의 성을 넘어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우리 모두의 이상형이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존재였다.
“사랑은 이제 갓 태어났든,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든, 언제나 햇빛을 만들어 우리의 가슴을 그 찬란한 빛으로 채운다. 그리고 넘쳐흘러 모든 바깥의 세상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