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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인 Nov 16. 2020

너의 행동이 들리기 시작했어

가려진 행복 속에서 보이는 불행

아이를 키우다 보니 , 나도 모르게 내 불안증세가 조금은 더 심해졌다.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기 위해 세탁실로 가거나,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시간에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나 넘어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그 소리는 다른 곳에서 나는 경우도 있었고, 첫째와 둘째가 이방 저 방을 다니면서 책장에서 책을 꺼내거나 인형들을 집어던지거나 첫째가 질투심으로 둘째를 밀어서 넘어진 소리였었다.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으니, 나도 모르게 나는 늘 예민한 상태였었다. 


그런데 이 예민한 감정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으로 가게 되면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물론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치는 경우도 있으니 오후쯤 되면 그날 활동한 사진을 보기 위해 다음 카페를 몇 번이고 들락날락하는 

엄마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서 불안이라는 요소를 뺄 수 있는 시간은 어린이집에 가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글을 쓰고 , 아이들 하원 시간이 다가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 집으로 와서 같이 놀아줄 때면 다시 불안한 마음과 예민한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옆에 있을 때가 행복했다.


며칠 전, 그날도 어린이집에서 오고 난 다음에 일이었다. 첫째 아이가 요새 자기주장이 심해진 탓에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고 느린 발달로 인해 그날은 밤에 잠들기 전까지 울었던 날이 있었는데 그 날은 지금 생각해도 절망적인 날이었다. 그런 절망들로 인해 내 안의 우울이라는 감정이 나오려고 했고 나는 그런 감정을 억지로 누르려고 했다. 감정이 바닥이다 보니 아이들이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기에 나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다음 날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 둘째를 아빠와 어린이집에 먼저 보내 놓은 뒤, 첫째와는 센터에 가서 수업을 받고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인덕이가 예쁜 짓을 많이 해요"라는 말이었다.

그 문장 한마디로 인해 나는 가라앉았던 기분이 좋아졌고, 센터 수업과 상담이 끝나자 인덕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에서 내려 아이를 반으로 보내고 담임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에서도 첫째는 칭찬을 들었다.


"어머니, 요새 인덕이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라는 두 번째의 칭찬이었다. 아이를 칭찬하는 말임에도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듣는 것처럼 나는 단번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경험을 했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우울이란 감정과 아이를 향한 미움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인덕이가 내 생각보다 다른 아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의 느린 발달로 인해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런 힘든 마음들이 아이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릇된 내 생각에서 올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 아이의 모든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집안일을 하고 있을 때면 첫째는 둘째와 같이 노는데, 둘째를 밀고 넘어트릴 때도 있지만 둘째에게 장난감을 양보하는 모습도 보이며 엄마의 집안일을 도와주겠다고 개어놓은 옷들을 정리하는 나에게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아이는 4살이지만 벌써부터 엄마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는데 나는 그 마음을 몰라준 것 같아 아이의 발달로만 아이를 판단한 것 같아 ,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사실, 남들보다 느리고 언어나 장난감을 대하는 모습들에서 발달지연을 보이면 그것보다 속상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가려진 행복 속에서 보이는 불행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행복은 우리들 안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이를 키우면서 슬프고 불행한 것보다 , 아이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내 멋대로 판단하는 습관은 없어져야 할 것 같다. 

아이와 내가 행복해지는 건, 있는 그대로 아이의 모습을 바라봐주고 아이를 기다려주는 것인 것 같다. 

부족한 내가 아이를 통해 , 조금은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같아 아이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아이는 나의 인생 속 또 다른 행복을 알려주는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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