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군인으로 복무할 때 내 전화기는 항상 정신없이 울어댔다. 직책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간부는 여기저기서 전화가 계속 오는 경우가 많다. 일과라는 시간적 개념이 없기에 휴일을 포함 저녁시간에도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
물론 전화보다 더 많이 울리는 것은 카톡이나 텔레그램 메시지이다. 수많은 공지와 지시사항은 민감한 내게 무엇인가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같이 느껴지곤 했다. 무서운 것은 이런 삶은 20년 정도 하다 보면 족쇄도 일상이 된다는 것이다. 양발과 양손에 무거운 무엇을 달고 다님에도 적응이 되어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 내가 전역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당연하듯 그것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을 것이다.
주변에 작은 행동과 자극에도 민감한 HSP 유형인 불안함에 매우 취약하다. 불안이라는 것이 꼭 큰일이 아니어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공지사항에 내 부서와 관련 없는 내용이 전파되어도 그것에 몰입해서 생각하거나 수많은 경우에 수를 떠올리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조금 무감각한 사람들을 그냥 쉽게 넘길 것을 나는 끌어안고 지낸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커서 금방 방전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나 학교 방학기간인 지금 내 전화기는 죽었다. 가족을 제외하거나 아주 친한 사람들을 연락을 빼면 내가 원하지 않는 전화가 울리지 않는다. 카톡도 조용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가 되면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고 하던데 반대로 나는 이 고요함이 좋다.
원하는 자극만 취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느낌이다. 잠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잠수는 일반적인 외면을 뜻한다. 분명 답변할 의무가 있고, 처리할 일이 있음에도 회피하고 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잠수를 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감하다는 것은 예민하다는 것이고, 강박적 사고와 행동도 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완벽주의자, 무결점을 추구한다고 책에 본 적이 있다. 아주 공감이 되어 밑줄을 긋고 그 문장을 계속 바라봤던 거 같다.
대충이라는 것이 매우 어렵고, 사소한 실수에 타격을 받기 때문에 업무처리 시 신중을 기한다. 물론 이것을 잘 활용하면 무기가 된다. 나는 참모부에서 일할 때 이러한 부분의 덕을 많이 봤다. 전화가 미친 듯이 울리는 그 바쁜 일정 속에서 보고서를 기안할 때면 전화기를 무음모드로 하고 욕먹을 각오로 서랍에 넣어 둔 경우도 많다.
한 번은 윗사람이 내게 전화를 걸며 사무실로 찾아왔고, 일부로 받지 않은 내 모습을 목격하고는 크게 노했던 일이 있다. 전화 벨소리 때문에 기안을 할 수 없어서 그랬다는 변명 따위가 통할 조직이 아니기에 나는 비난과 질책을 온몸으로 받았다. 언제나 대기모드로 지내야 하는 군인의 본분까지 이야기하며 핏줄 터져라 훈계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 생생하다.
일주일 뒤면 이제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강의가 시작된다. 여기도 조직이라서 시간강사 카톡방이 개설되고 통제와 전파를 위한 밴드도 다시 생겨난다. 예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잔잔한 호수처럼 큰 자극이 없지만 그럼에도 긴장감은 다시 생겨난다. 단지 좋은 점은 전화로 무엇을 물어보거나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로 전화 번화를 공유하지도 않는다. 정말 급하면 카카오톡 보이스톡으로 연락이 오는데 반년 정도 일해본 결과 업무시간 이외에 음성통화를 할 확률은 매우 낮다.
처음에는 이런 조직의 체계가 잘 적응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돌아가나? 의심이 생기고 스멀스멀 민감한 안테나가 올라가서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음성통화가 불편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순간 묘한 감정 때문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마다 연락에 대한 의미가 다를 것이다. HSP이라고 해도 외향적인 사람이 존재할 것이고,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추구하다 보니 외부의 자극에 더 민감할지도 모른다. 근데 마흔이 넘어 조금씩 인생을 돌아보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 주변의 잡음과 먹고사는 일에 정신이 없어서 보통 내가 누구인지? 내가 정말 편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모두 안다.
인생은 정말 외로움과 동행하는 길고 고독한 여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구를 곁에 둔다고 해도 나보다 오랜 시간 곁에 둘 수는 없다. 결국 내 곁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https://brunch.co.kr/magazine/dontforgetus
https://brunch.co.kr/brunchbook/mylifeis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