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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심사에서 미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by 고용환


어느 정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는 것들이 늘어났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긴다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분노보다는 평온함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모든 감정처리 절차는 성숙했기에 행동하는 것보다 내가 살기 위해, 나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이다. 발버둥 치고 난리쳐봐야 돌아오른 건 뇌혈관 자극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냥 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운'이라는 것을 타고 난다. 그 운은 환경으로 이어지고 환경은 그 사람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환경이 좋은 사람이 모두 크게 성공하고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건 아니다. 그중에서 미끄러져 나락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확률 게임에서 생존할 가능성은 훨씬 높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런 환경에 대한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냥 하루가 짧다. 내 환경이 최고이고, 재미있게 놀 것들이 넘쳐난다. 흥미도 한정적이라서 몇 가지만 해소하면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주변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비교'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던 신분의 장벽과 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도 그 선과 벽을 발견했었다. 특히나 과민하게 민감한 내게 그 벽은 짜증으로 다가왔고, 청소년기 나는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안에서 치밀어오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뛰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혼잣말을 하는 등 소위 어디가 이상한 아이처럼 종종 그랬던 거 같다. 그 모습을 기억해 주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마흔이 넘은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좌절을 벗 삼아 그냥 운명이 이끄는 데로, 때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객관식의 최선으로 여기는 답을 찍으며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냈다. 고개 숙인 상태로 낮게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나는 어렵게 희망을 품었다. 열심히 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겠다고. 아마도 그 희망을 연료 삼아 학업을 시작했던 거 같다. 뭐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일 끝나고 밤마다 책을 펴고 공부했던 건 아니다. 충분히 공부머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좋은 습관이 미래에 나를 더 좋게 만들어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를 끝내면 다른 하나를 시작하고, 또 끝내고 시작하고를 반복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내 행동은 '강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고 초조해지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발씩 다가가 다른 문을 열고 나를 태워 무엇인가 만들어가면서 인생의 벽에 대한 생각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면서 희망고문은 시작되었다.


물론 지방대도 아닌 사이버 대학으로 수능도 안 보고 이곳 저것 배회하듯 학위를 받고 지방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내 삶이 크게 변할 거라고 굳게 믿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순수한 바보는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 얻은 것이 있기에 배움이라는 과정이 헛고생은 아니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흉내를 냈던 것들이 내 것이라는 무엇으로 포장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 무언가도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논문을 쓰고 심사장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고, 사춘기 시절 분노를 다시 느끼며 포기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겨우겨우 하나의 산을 넘어 박사과정에 갔고, 처음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서 또 심사평에 좌절하고 부딪치고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몇 편의 논문을 투고했다. 해외논문도 아니고 국내논문 고작 몇 편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바닥에서 시작한 나라서 스스로 격려했다.


이런 것이 잠재력이라고 주변 누군가 나에게 희망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잠재력을 더 빨리 채워줬더라면, 그랬다면 혹시나 TV에 나오는 어느 유명인사의 자녀처럼 삼십 대 초반에 국립대에 전임교원으로 자리를 잡고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세상에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십 대 때 할만한 생각을 마흔이 넘어하곤 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내가 괜찮으면 세상도 괜찮은 거라고 그렇게 말하기 나는 너무 민감하다. 예민해서 아프다. 전공으로 시간강사라도 해보고 싶어 학위 예정자가 되자마자 미천한 스펙으로 이곳 저것 임용지원서를 넣었다. 연구실적과 학력, 경력을 쓰고 또 쓰면서 깨달았다. 이거 뽑히면 그게 반칙이겠네. 그래서 그런지 '서류심사에서 떨어졌습니다.'라는 이메일만 최근에 몇 통을 넘게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 또 서류를 작성했다. 좌절로 주저 앉기보다는 익명의 누군가를 보고 다시 일어났다. '수능을 보고 정규과정을 거쳐 박사학위를 더 좋은 곳에서 받은 누군가 139번 떨어지고, 140번째 시간강사로 한 과목을 배정'받았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글을 우연히 읽고 오만한 나 자신에게 찬물을 부었다.


가끔은 인생 참 편하게 사는 사람들, 그 편함은 자기만족에 대한 기준점이 확실하고 때로는 낮아서 현재에 만족감이 큰 그럼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그들이 참 부러울 때가 있다.


'내게 저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올까?'

'이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 결승선을 있겠지?'


아마도 나중에 지쳐서 나도 멈춰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어제 어렵게 잠자리에 들었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나 스스로 나를 부정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마음 편하고자 주말에 무엇인가를 찾고 지금도 키보드를 두드린다.




'출발선은 뒤에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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