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에서의 프러포즈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석사를 알아보던 나는 TESOL이라는 영어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울 유명 대학교 몇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한양대, 한국외대, 경희대 등등 태어나서 문턱조차 넘지 못할 것 같았던 곳이었다. 운이 좋게 모든 대학에 서류를 통과하고 당당히 번호표를 달고 영어 면접을 보았다. 바로 테솔 대학원에 가는 것보다 6개월 자격증 과정을 먼저 수료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같이 면접 보러 오는 사람들은 나이도 다양하고 영어 실력도 정말 훌륭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스펙이 좋았다.
물론 최종 합격은 기대도 안 했다. 이런 유명 대학에서 검정고시 졸업, 학점은행제 전문하사,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를 받은 나를 받아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절함을 담아 최선을 다해 면접을 봤다.
놀랍게도 내 삶을 위로하듯 모든 대학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한참을 학교를 두고 고민하다가 한국외대 테솔 전문교육원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다. 평일 야간과 주말에 수업을 선택했다. 평일은 부대에 양해를 구하고 수업 있는 날은 칼퇴근을 하고 학교로 출발했다. 그럼에도 20분씩 지각을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아끼고자 삼각김밥을 먹으며 학교로 향하곤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에 너무도 막막했던 삶이었다. 하지만 내가 번 돈으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채워가면서 천천히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내면의 성장이 좋았다. 배움이라는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들, 그 관계는 내게 언제나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유일한 남학생이었던 나를 보고 같이 수업 듣던 누님들이 동갑내기인 아내와 나를 연결해 주기 위해 작고 큰 분위기를 조성해 줬다. 인연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어지곤 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던 우리는 늦은 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성적인 감정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온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에너지를 소비하기에 눈앞에 벌이진 상황들이 너무 많았다. 어린 시절 주체할 수 없이 생겨났던 성욕이나 호기심은 바쁜 일상 속에서 감각이 무뎌졌다. 가끔은 물불 가리 않고 사랑에 빠졌던 그 순수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지만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사랑에 대한 우선순위는 점점 뒤로 밀려났다.
아내는 군인이 이런 곳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신기하다며 내게 작은 호기심을 보였다. 우리는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온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공유하였다. 나이가 차면서 이성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 특히 가난에 대하여 듣기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그 포근함과 이해심이 좋았다. 내가 정말 힘들 때 기댈 곳을 찾은 것만 같았다. 언제나 누군가의 기둥이 되어야 했던 지친 몸을 잠시라도 기댈 곳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아주 길지는 않지만 둘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며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고 이런 여자라면 남은 여정을 같이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다. 무엇인가 기억에 남는 그런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날을 떠올리면 그래도 웃음이 넘치도록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의 장면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결국 남들이 했던 것이 아닌 나다운 프러포즈를 그녀에게 하기로 결심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카페를 가기 위해 차를 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드라이브하고 싶다고 말하며 차를 김포 쪽으로 틀었다. 갑자기 무슨 드라이브냐고 말하며, 그녀는 48번 국도의 주변을 살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40분 정도 지나 첫 번째로 산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단지 중앙으로 가서 18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저 집이 바로 우리 집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내는 조금 당황한 듯 잠시 조용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내 눈을 바라보고 웃었다. 직감적으로 내가 프러포즈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차에 태웠다.
“어디 가?”
“응? 금방 가.”
금방 간다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그녀는 뭔가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10분 정도 운전해서 두 번째 아파트가 있는 신축 단지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고가다리 밑에서 3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도 우리 집이야. 물론 진짜 주인은 은행이지만 무늬는 우리 집이 맞아…. "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잠시 웃음을 참는 듯했다. 아마도 풍선이나 화려한 케이크, 반짝이는 반지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이야?”
“응, 우리 집이야. 나랑 결혼해 줄래?”
그렇게 아파트 앞에서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순간 빛나는 화려함이 아닌 단단함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행복한 앞날을 꿈꾸며 사랑을 깊은 곳에 남겼다. 밤이 늦도록 그녀에게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집들을 샀는지 천천히 이야기했다. 대출로 산 빈껍데기라도 이 땅 위에 내 것을 가지고 싶었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가 보내온 시간들을 위로해 줬다. 앞으로는 혼자 애쓰지 말고 함께 하자고 응원하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결혼하면 잠시동안만 관사에 살자고 부탁을 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아내는 웃으며 괜찮다고 알겠다고 대답해 줬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집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다. 그러면서 내 어릴 적 소박했던 꿈 이야기도 해줬다. 3층짜리 단독주택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 같이 사는 그 작지만 이루기 힘든 꿈을 풀어놓았다. 현실적으로 이미 불가능한 꿈이었다.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고, 어린 시절 흔하게 봤던 오래된 단독주택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설령 남아 있다고 해도 쉽게 살 수 없을 만큼 가격은 올라있었다. 내가 바랬던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우리만의 울타리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막연한 꿈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아내는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냐고 장난기 섞인 말투로 물었다. 우리 둘은 말없이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짧은 연애 기간을 거쳐 우리는 아담한 장소에서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이후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넘쳐나는 일을 처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부대까지 옮기게 되었다. 수도권에서만 그것도 서울에서만 10년 넘도록 있다가 곧 출산을 앞둔 아내를 데리고 낯선 전라북도로 이사를 했다. 전후방 교류에 제한이 된다며 사정이 있다고 말하고 버티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인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이동해야만 해야 했다. 거주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없는 직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 순번이 오니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동안 어떤 심정으로 선배들이 지내왔는지 비로소 헤아리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그동안 해왔던 일이 아닌 새로운 보직까지 받으니 더욱 정신이 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운 좋게 서울에서 근무했던 나는 처음으로 지방에 내려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복 받은 군 생활을 했는지 깨달았다. 힘들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태생인 아내도 친구 한 명 없는 지방에 와서 적응하는데 많이 힘들어했다. 홑몸도 아니어서 스트레스는 계속 늘어만 갔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두고 당직 때문에 외박하게 되면 불안하고 미안해서 몇 번이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 주변에 편의점 하나도 없는 적막한 그곳에서 아내는 속으로 수없이 눈물을 삼켰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만큼이나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볼 수 있었던 엄마를 못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만들어도 한 달에 한 번 올라가서 잠시 얼굴을 보는 게 최선이었다. 엄마는 소망대로 연금 기간을 채우고 퇴직했다. 퇴직한 엄마는 집에만 머물렀다. 가끔 통화해도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걱정되어 동생한테 신경 좀 더 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자 투자를 위한 공부는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니 원망만 늘어났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 던 어느 날 동훈이게 연락이 왔다.
“요한아. 나 청약됐어.” 동훈이의 목소리를 흥분으로 가득했다.
“어? 진짜? 축하해! 어디에 넣었는데…?”
“엄마 집 근처에 넣었어.”
“녹번역?”
“어.”
“우와 축하해! 너 벼락부자 됐네. 분양가 얼마인데?”
“4억 4천만 원이야. 근데 저층이라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저층이어도 무조건 가져가야지. 최소 프리미엄만 3억은 거뜬히 넘길 것 같은데….”
“진짜…?”
“어. 신축은 주변 따라가니까…. 정말 축하한다.”
한참 동안 대출 문제나 여러 가지 부동산 기본 상식에 대해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제일 친한 놈이 그것도 서울에 청약이 되니까 내 일처럼 기뻤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왔다.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었다. 막상 질투하는 내 모습을 보니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친 듯이 고생해서 아파트 두 개를 겨우 얻어 순자산이 3억이 되어 가는데, 동훈이는 한 방에 내가 가진 모든 것 초월해 버리니 왠지 모르게 분했다. 내가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이렇게 돈 앞에서는 사람이 치졸해지는구나 싶었다.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밝은 척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내는 미묘한 나의 감정을 읽었다.
“뭔 일 있어? 어머니 많이 안 좋으시대?”
“아니야. 별일 없어.”
계속 궁금해하며 걱정하는 아내에게 잠들기 전 동훈이 이야기를 하였다. 친한 친구가 잘되는 모습에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옹졸한 놈으로 보일까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털어놓아야만 했다. 아내는 나를 뻔히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억울해하지 마. 같은 돈이라도 당신 돈에는 노력이 더 들어 있으니까. 당신이 더 부자야. 걱정하지 마. 사람은 다 질투해.”
돈을 크기로 보지 않고 노력이라는 무게로 표현해 주는 아내의 위로를 받으며 힘들게 잠자리에 들었다. 뒤쳐지는 게 싫어서 발버둥 치며 살았는데 이렇게 추월당하는 것이 불편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어릴 때 이미 배웠지만 여전히 기울어져 있는 게 싫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가만히 아무것도 안 했던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친구가 가진 아파트를 미워하되 친구는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서울에서 영어 강사를 하던 아내는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임신을 했다. 신혼 생활은 아주 짧았다. 자연스럽게 아내는 경력 단절로 집에 머무는 신세가 되었다. 주변에 친구도 하나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내에게 같이 투자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둘 다 소비 욕구가 크게 없고 검소해서 소비와 관련해서 의견 충돌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절약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주식 투자는 여전히 위험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부동산 투자를 위한 임장을 같이 다니는 것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지만 여전히 주식은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주식? 망해. 안 돼.” 아내의 표정은 단호했다.
“아니. 소액으로 연습하는 거지.”
“아니야…. 자기도 알잖아. 주식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
“알지. 그런데 무리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 책을 봐도 그렇고.”
“부동산으로 부자 됐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주식으로 부자 됐다는 사람은 전문가 말고는 거의 없는 것 같아. 우리 절대로 하지 말자.”
아내의 어린 시절은 부족함 없이 부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회사 퇴직하고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고 주식 버블이 한창이었던 그 시기에 주식을 하다가 아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가정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화목했던 집안은 산산조각 났고, 어머니까지 아프게 되면서 아내도 꿈을 접고 방황의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다고 했다. 그런 아내에게 주식은 ‘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내는 검소하고 성실한 나를 좋아했다. 무엇보다 군인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더 든든했다고 말했다. 연애하던 시절 언젠가 아내가 내 차에 대해서 물었다.
“왜? 차를 안 바꿔? 남자들은 차에 관심 많잖아?”
“차? 왜? 이거 쪽팔려?”
“하하. 아니야. 괜찮아. 난 좋은데 우리 향기와 추억도 있고, 아직 에어컨도 잘 나오고, 내부는 자기가 맨날 청소해서 깨끗하고.”
“나도 가끔 좋은 차 타고 싶지. 근데 차가 우선순위가 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한 번 좋은 차를 타면 다음부터 후진 차는 안 타는 게 사람이더라고. 그리고 잠깐 어디 갔다가 하루 종일 길바닥에 세워 두는데 관상용으로 좋은 차를 사는 게 사실 돈이 아까워.”
“그냥 어떤 생각으로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니는지 궁금했어.”
아내를 내 말을 듣고 과거 장인어른 사업이 잘될 때 비싼 외제 차를 타고 다녔다고 했다. 그때 아내도 아빠 외제차에 타면 왠지 모르게 좋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애처럼 차를 자랑하는 아빠가 유치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업이 기울고 어쩔 수 없이 장인어른은 그 비싼 외제 차를 헐값에 넘겼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시절 추억에 잠겨 사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나는 곧 태어날 우리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투자를 포함한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아내를 설득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힘들게 합의점을 찾았다. 아내는 집에 있으면서 틈틈이 주식 공부를 시작했고 초기 자본금은 당근마켓에서 팔아 만든 돈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안 쓰는 물건을 찾아 사소한 것까지 당근에 팔았다. 그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무리 검소하게 살아도 안 쓰는 물건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팔고 그 돈을 저축하니 기분이 좋았다.
한 달 정도 당근에서 물건을 판 후에 잔액 자동 저축으로 모아 둔 돈을 합치니 대략 300만 원 정도의 투자금이 만들어졌다. 퇴근 후 아내와 어떤 주식을 살지 고민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잠시나마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아내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는데, 20대 중반부터 적지만 월세를 받았는데 나는 그 돈으로 대출금을 상환하거나 급하면 쓰려고 했거든. 근데 만약에 내가 그 오랜 시간 꾸준히 주식을 샀다면 정말 수익률이 높았을 것 같더라고. 그리고 망한 사람들을 보니 남 말만 듣고 확신 없이 사서 그런 것 같았어. 그냥 아파트를 1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것처럼 좋은 회사의 주식을 꾸준히 모으는 건 크게 위험할 것 같지 않더라고…. 그리고 자기한테 말은 안 했지만 경제 공부하는 셈 치고 100만 원으로 2016년부터 주식은 하고 있었어. 근데 이게 공부도 되고 모랄까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더라고.”
진지함으로 무장을 하고 설명하는 나를 보며 아내도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아…. 그럼 뭐 사고 싶은데….”
“그게…. 고민이야. 최근에 미국 주식도 좀 봤는데 그쪽이 더 좋을 것 같아.”
“미국? 왜 미국이 좋아? ”
“그거 알아? 우리나라 주식시장 전체 시총을 합친 것보다 자기 핸드폰 만든 애플 시총이 더 큰 거?”
“진짜? 대단하다.”
“그렇더라고. 나도 처음에 놀랐어. 근데 공부하다 보니 이해가 되더라. 미국에서 만들면 전 세계가 다 쓰잖아.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장점이 너무 많아.”
내가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고, 돈이 몰리는 곳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하니 아내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야 하지. 싸이월드나 페북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 근데 싸이월드는 사라져 버렸잖아.”
“맞네…. 참 우리 어릴 때 싸이월드 많이 했는데…. 한번 고민해 보자. 나중에 엄청나게 크게 성장할 것 같은 산업 중에서도 1등 기업을 찾아서 욕심 없이 투자해 보면 좋을 것 같아. 훗날 우리 딸 결혼할 때 ‘짠’하고 주면 좋을 것 같아.”
우리는 신중하고 주식 종목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을 가야 하는데 이번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몸이 무거운 아내를 집에 홀로 두고 서둘러 휴가를 내고 서울로 향했다.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엄마의 체구는 더 작아져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하고 좋아하는 삼계탕을 사드렸는데 고기 몇 개 집어 먹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위를 대부분 절제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기운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구석이 절단되는 것처럼 아팠다.
“엄마, 많이 먹어야지…. 곧 손녀도 태어나는데….”
“그래…. 근데…. 정말 못 먹겠어.”
“그래도 좀만 더 먹어 봐요.”
의사는 아직 다른 곳에 전이되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체중이 너무 빠져서 그게 걱정이라고 잘 챙겨 드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병원을 나와 집에 도착한 우리는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아무 일 없는 듯 행복한 척을 했다.
그날 저녁 무거운 마음을 달래러 영만이와 동훈을 보러 나섰다. 동훈이 청약 당첨 이후 처음 만나는 술자리였다. 가게 문을 열자 익숙한 소음이 먼저 밀려왔다. 숟가락이 그릇을 치는 소리, 누군가의 웃음이 튀는 소리, 간판 불빛 아래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나는 그 소음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마음은 들어가지 못했다. 몸만 와 있었다. 여전히 정신은 엄마의 마른 손등 위에 얹혀 있었다. ‘아까 삼계탕… 고기 몇 점. 그게 끝이었지.’ 입술을 다물어도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 그 손끝이 잠깐 떨렸던 것 같은데. 그 떨림을 내가 과장해서 본 건지, 정말 본 건지 확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는 게 더 무서웠다. 사람은 확실한 공포보다, 애매한 불안을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애매함은 끝없는 상상을 만들었다.
“왔어?” 동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얼굴 좋네. 좋아.”
“축하해. 오늘 쏘나?”
“뭘…. 그래. 그래. 내가 1차 쏠게.”
“이야. 그거 많이 오르겠던데. 거의 4억 아니야?” 영만이도 부러운 듯 동훈 아파트 주변 시세를 말하며 동훈이를 보고 이야기했다.
“내가 볼 때는 더 오를 것 같아. 부러운 놈.”
나도 모르게 ‘부러운 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가 싫었다. 그 말이 나쁜 말인 걸 알면서도, 그 말이 나를 잠깐 숨 쉬게 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 꽉 막힌 가슴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처럼. ‘부럽다’는 말은 사실 미움이 아니었다. 그 말은 내 안의 불안이 밖으로 새는 소리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부동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먼저 아빠가 된 동훈이는 곧 태어날 내 딸을 두고 이런저런 아빠표 훈수를 늘어놓았다.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날의 나는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었다. 술이 입안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갈 때, 그 따뜻함이 잠시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날의 나는 짐승과 사람 둘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엄마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빨리 취해 버린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술잔 속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얼굴은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뭔가 자꾸 쌓여서, 눈 밑이 가라앉아 있고, 입꼬리가 무겁고, 사람을 잘 알기도 전에 먼저 그 사람을 파악하고 계산부터 하는 흉측한 얼굴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됐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데 동훈이 엄마의 안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많이 안 좋아 보여. 몸무게가 50kg도 안 되더라. 뼈만 남았어.”
말을 하자마자 가슴 안쪽이 꺼져 내렸다. ‘뼈만 남았어’라는 표현이 너무 잔인하게 들려서, 내 입이 내 마음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안다. 누군가에게 엄마의 상태를 ‘정확히’ 말해야만, 그 현실이 내 혼자만의 악몽이 아니게 되니까. 말로 꺼내면, 현실이 내 몸 밖으로도 존재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너도 걱정 많겠다. 좀만 마셔. 취할라.”
“너 집도 많이 오르지 않았어?”
“아니. 별로.”
“청약이 갑이네.”
“요한이 부동산 박사더라. 이번에 내가 많이 물어봤는데 그렇게 많이 아는 줄 몰랐다니까.”
“원래 집요해서 하나 파면 계속 파잖아. 끝도 없이. 근데 보니까 청약이 답인 것 같아. 나는 계속 무주택으로 있다가 한 방을 노려야겠어.” 영만의 그 말에 순간 울컥했다.
‘한 방.’ 가볍게 던지는 말인데, 내게는 이상하게도 무겁게 들렸다. ‘한 방’이라는 말속에는 ‘그동안의 과정’이 지워져 있었다. 지워지는 건 늘 내가 견뎌온 것들이었다. 임장 다니던 밤, 엑셀 켜고 숫자 맞추던 새벽, 돈이 모자라 숨이 가빠지던 순간,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붙잡으려고 안간힘 쓰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이 ‘한 방’ 앞에서 갑자기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참 운도 없지. 이렇게 한 방에 큰돈도 벌고…. 난 뭐냐.”
그렇게 말했을 때, 동훈을 공격하려던 게 아니었다. 나는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내가 던진 말은 결국 칼이 되어 누군가에게 닿았다. 동훈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분위기를 갑자기 어두워졌다.
“야. 나도 고생한 거야.”
“고생? 뭐, 마우스 클릭한 거?” 말은 한 번 날아가면, 점점 더 멀리 날아간다. 동훈이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것은 노력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여기서 멈춰라’고 말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날 내 안에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엄마의 몸, 내 평정심, 가장이라는 자존심. 무너지는 것들 위에 또 하나 무너지는 걸 인정하면, 진짜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라도 싸워야 했다.
“뭐 말을 그렇게 하냐? 이것도 공부해야 해. 그리고 여기만 넣었겠냐? 계속 넣었지.”
“싸우지 마. 유치하게. 너희 둘 다 부자니까 그만 좀 해라.”
“요한이 말하는 게 뭐 나는 땅에서 돈 주운 것처럼 말하잖아. 맨날 자기만 제일 힘들고 대단한 척하고….”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대단한 척.’ 대단한 척을 한 적이 없다고, 아니 정확히는 ‘대단해 보이고 싶지 않은데 자꾸 대단해 보이게 말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누구보다 비참했던 시간을 지나왔고, 그 비참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기어코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
설명이 많은 사람은 종종 ‘변명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변명이 많으면 ‘잘난 척’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내 서사를 꺼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스쳤다.
“괜찮아. 너는 너대로 살아.”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짐처럼 느껴졌다.
“막 말하지 마. 아파트 한 채 사려고 얼마나 임장 다니고 개고생 하는데, 클릭 몇 번에 뺑뺑이로 된 게 노력이냐. 운이지. 청약은 그냥 복권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느꼈다. 모든 주변 공기는 달라졌다. 같은 가게, 같은 테이블, 같은 술잔인데, 그 순간부터는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멀어졌다. 우리 테이블만, 유난히 밝은 조명 아래로 끌려 나온 것처럼 선명해졌다. 친구들의 얼굴이 잠깐 멈춰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그 짧은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청약을 욕한 게 아니라, 내가 견뎌온 ‘시간’이 값싸게 느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청약이 부러웠다. 부러움은 곧 질투였고, 질투는 관계의 파멸을 불러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 부족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불안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엄마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내 안에서 미친 듯이 맴돌았다. 그러자 입이 더 독해졌다.
나쁜 감정은 나쁜 말이 되어 칼날을 드러냈다. 알코올이 내 안의 모든 절제와 이성을 무너뜨렸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가슴 밑으로 밀어 넣어 보려고 해도 입 밖으로 말은 계속 나왔다. 청약 따위는 노력이 아니라는 단호한 태도에 동훈이는 상처받았다. 그 상처받은 얼굴을 보는 순간에도, 바로 사과하지 못했다.
“운도 실력이다.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술이나 처먹어. 그럼 태어날 때부터 몇천억씩 있는 애들은? 걔들이 운이지.” 그 말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청약조차 시도할 필요가 없는 그들. 동훈은 그런 아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맞는 말 앞에서 나는 더 초라해진다. 나는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술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셋 다였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아주 늦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오늘…. 취했나 봐….” 사과는 말의 끝에 붙어 있었고, 마음의 중심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지저분한 사과였다. 그래서 더 늦은 사과였다.
이후 동훈이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충분히 서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집에 와서 아내에게 술자리 이야기를 했다. 엄마까지 아프고 나니 사실 더 조급해졌다. 혹시나 생길 병원비나 어머니 생활비 그렇고 딸까지 태어난다고 하니 끝도 없이 무게감이 마치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것처럼 나를 억눌렀다. 가장의 무게를 견디는 게 너무 버거웠다. 모든 걸 포기하고 군장을 내려놓고 싶었다. 낙오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