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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Feb 03. 2021

부자가 되기 위한 1억 만들기

목돈 마련 노하우와 종잣돈의 중요성

너무도 평범해서 내세울 것 하나없는 저자가 가난속에서 발버둥치며 살면서 고등학교 자퇴 이후 20년동안 저임금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꾸준히 저축과 작은 투자를 통해 10억 이상의 순자산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린 전자책(크몽)의 일부 내용 입니다.

  어린 시절 베이붐 세대에 태어난 부모님 밑에서 가난하지만 가난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면서 청소년기를 맞이 했습니다. 부모님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6살까지 사셨고 다음 해 반지하에서 탈출해서 단칸방이지만 지상으로 올라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나서 단칸방은 더 좁아지고 결국 저는 잠자리 포지션에서 밀려나서 다리를 쭉 펴지 못하고 잠을 잤던 추억이 있고요. 다행히도 부모님의 노력으로 10살 때 방 2칸짜리 빌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동생과 함께 였지만 독립된 공간이 생긴 기쁨에 며칠 동안 밤 늦게 잠을 자다가 엄마에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1997IMF라는 놈을 만났고 아버지의 작은 사업은 뿌리조차 찾을 수 없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죠,,,,


한 집안에 가장이 무너지는 비참한 모습을 사춘기 시절 옆에서 숨죽여 지켜보았습니다.

이후 생계를 위해서 어머니는 밤낮으로 일을 했고, 저는 아침에 전단지 알바를 하면서 나름 학업도 열심히 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에 계속 떨어지는 성적으로 원망은 쌓여갔죠. 아르바이트를 늘려서 했지만 그것으로 집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없기에 결국 자진 퇴학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문제 학생도 아니었고, 나름 인문계 고등학교 였는데 담임선생님은 말리거나 설득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서운함과 무관심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턱대고 17살 나이에 중졸 신분의 노동자로 자신 있게 사회로 나와서

(그냥 조용히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를 졸업했다면 후회 많이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죠. 아르바이트는 급여가 적기 때문에 월급을 주는 직장 위주 찾아서 일을 했습니다.


대략 병사로 입대 전까지 한 일들은 정리해보면 영화소품 스탭, 가정용 석유배달, 영어교재 텔레마케터, 불법 첨가제 판매, 삼성 택배 기사, 현대백화점 곶감 물류관리, 현대백화점 판매 매니저, 일용직 막일 그리고 흔히 알고 있는 아르바이트 등입니다.

어린 나이지만 사회는 정말 비겁하고 약자에게 더 매몰차다는 것은 깨달았습니다.


텔레마케팅 할 때는 영어교재 한 달에 겨우 한 개 팔기도 힘들었고, 어떤 우연인지 교재를 많이 팔았던 어느 달에 출근하니 종로에 있던 회사가 통째로 사라졌던 기억도 있습니다. 회사 계단에는 다른 직원들이 울고 있었죠.

결국 모여서 회사를 찾아다니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했지만 돈은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택배 배달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이유로 요즘도 기사분들께 매우 친절하게 행동하고 있기는 하답니다. 제가 19살 면허 취득과 동시에 운전 잘한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월급이 높다는 이유로 택배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 30분까지 물류센터 출근

해당 지역 물류 분류 및 차량 적재

배송 시작 (물량이 너무 많으면 다시 물류센터로 와서 적재)

정산 및 결산 / 평균 저녁 10:30분 퇴근


했던 일들은 4줄로 정리가 되지만 당시에는 2001년도에는 내비게이션도 없었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주소를 찾아서 배송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특히, 신입은 빌라 위주로 지역을 줘서 엘레버이터가 없어서 김치나 고추장 등 무거운 물건이 오면 정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돈도 줘가며 물건 올리고 했습니다.

그것도 힘들면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주말에 같이 배송을 했습니다. 물론 일 끝나면 맛난 것을 사주곤 했는데 항상 편하게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명절이 다가오면 그 40대 아저씨들도 끝없이 들어오는 배송 물량에 감당 못하고 차량을 두고 도망을 가는 것도 봤습니다.

그렇게 실종이 되면 차량을 찾아서 주변 지역 기사들이 나서도 그 물량을 나눠 받아서 배송을 해야 했죠. 너무 많은 물량에 식료품 (김치나 상하는 것들) 배송이 늦어지면 변상은 택배기사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실수니까 받아들여야 했지만, 고객분들께 모욕적인 발언을 들으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은 바닦으로 내동댕이 쳐지고 인생이 한없이 초라해졌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뒤로하고 21살 초에 병사로 군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2004년도만 해도 군 부조리가 남아 있었죠. 남성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정말 생각하기 싫은 그 분위기. 최근에 #넷플리스 에서 방영하는 #DP 를 보면서 그 시절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오르곤 했습니다. (요즘은 영화처럼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먹는 것도 눈치 보여서 잘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숨어서 몰래 초코바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웃프게도 맛은 기가 막혔죠. 신기하게도 이런 눈치 보이는 병사생활인데 이등병에서 일병이 되고 6개월 될 때 직업군인으로 부사관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년이 지나야 지원 가능해서 남은 6개월은 더 준비하자는 이유로 부대에 보고를 했는데

부모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지금까지 집에 생활비를 드리며 친구들 놀고 먹고 학원 다니고 할 때 어린 어른인 척 살았는데 부모님 동의라고 하니? 비웃음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전화를 했습니다. 면회 오시라고 근데 참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죠.


큰 아들, 왜 부사관을 지원하려고 해? 나가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수없이 많은데..


아빠는 허락 못하겠다고 하시며 반대에 부딪쳤죠.

세상에 쭉 노련서 집게 계시던 아버지가 반대를 하니 저는 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빠, 일 하면 나 부사관 지원 안 할게."


그리고 한 달 뒤 어머니에게 부대로 전화가 왔습니다.


"니 아빠 일 시작했다."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부사관에 지원해서 하사로 임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원 동기는 17살부터 21살까지 4년 동안 사회의 밑바닥에서 눈탱이 맞고, 검정고시 출신이라고 무시도 당하고, 힘들었던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니 전역이 무서웠습니다.

 왠지 다시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무척이나 두려웠습니다.

적어도 군대는 점심때 편하게 밥은 먹을 수 있고, 시키는 일 열심히 하면 잘한다고 인정도 해주고 자동적으로 병사들 때문에 적당한 위치도 보장 받는다는 것이 완변 밑바닥이라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그리고 당시에 병사에서 부사관 지원하면 장려금이라고 840만 원을 임관하는 달에 줬습니다


병사 입대를 하는 날 보충대에서 그동안 일해서 모은 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저는 정말 가진 게 없이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몸뚱이 하나가 전 재산이였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을 위한 목돈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육군 하사로 임관하고 첫 달에

기여금 840만 원과 첫 월급 110만 원이 함께 급여 통장으로 입금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통장에 잔고를 보면서 꼭 부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동네 친구들을 만나면 너희 천만 원 있어? 이렇게 물으면서 있는 척 아닌 척도 했고요.

그리고 21살 그 때 그 종잣돈을 시작으로 1억을 만들기 목표를 세웠습니다. 사실 절약만 하면 금방 모을 줄 알았습니다. 부사관이 되어서 군인공제회에 (복리 5%~6%)에 100구좌를 매달 50만 원씩 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에 600만 원을 모을 수 있었죠. 이자까지 하면 돈은 더 되고요. 그리고 수당이나 남은 돈은 모조리 해외 펀드에 투자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금융지식이 없어서 그냥 은행 가서 "수익률 높은 것으로 해주세요"라고 하고 적립식으로 입금을 했습니다.

거 한 달 용돈 8만 원으로 생활하며 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작은 생활비로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제가 직업군인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대 모을 수 있는 돈은 월 70만원 ~ 80만원이 최고로 저축 가능한 금액이었습니다.

계산을 해보니 매달 70만원 평균을 잡고

1년에 840만 원이 모이게 되고 12년이 지나면 1억 80만 원을 모을 수 있는 것을 계산했습니다.

22살에 저축을 시작했으니 즉, 34살이 되어야 1억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가혹했죠.

물론, 펀드 수익률과 복리 이자 수익률을 포함하면 시간을 더 단축될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서 기간을 단축시키는 유일한 방법을 고민했고 저축 2년차, 마인드를 바꾸고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당시 2007년도였습니다. 그런 노력은 부동산 투자로 자연스럽게 저를 이끌었고 27살에 1억을 모으는데 성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3년 동안 아끼고 아껴서 3천만 원의 목돈을 마련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소비욕구를 잠재우고 오로지 목돈을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버틴 고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재테크 관련 서적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큰 영감을 준 책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였습니다. 로버트 가요사키가 쓴 책이죠. 지금처럼 많은 투자 서적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제목에 끌려서 우연히 산 책은 저에게 큰 도움과 가치관의 변화를 안겨주었죠.


우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바로 주택 구입였습니다. 불우한 환경때문에 어린 나이에 동기부여가 되었기에 빨리 투자를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군에 들어가기 전에 방 두 칸짜리 집에 부모님은 전세로 거주중이셨는데, 참 주인분이 너무도 인정도 없고 해서, 집 없는 사람의 서러움을 봤어요. 그 오래된 빨간 벽돌집, 바퀴벌레도 많이 나오고, 외풍도 심해서 겨울에는 이불을 두개 덮고 잤던 그런 집이라도

 집주인이 수많은 갑질을 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부모님이 고개를 떨구시는 모습은 저에게 상처이자 가난을 탈출해야 하는 분명한 목표를 안겨준 것 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모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서 빌라로 이사를 갔던 건데 전세로 시작해서 전세값을 감당못하고 월세로 전환해서 살았었죠.  물론 아버지의 경제력 상실과 빚 때문에 어머니와 제가 번 돈은 부채를 갚는 것에 집중했기에 별도로 모을 돈도 없었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투자 목적으로 집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나중에 결혼을 해서 집사람과 자식에게 가장의 뒷모습이 떨리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사관 된 시기는 2005년이었습니다. 병사 복무를 하면 원복하는 제도 덕으로 생활하던 부대로 재 보직을 받아서 서울 근처에서 근무를 하게 됐고요. 그런 지형적 특권 때문에 군인이지만 투자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무작정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틈 나대로 갔습니다.

군복을 입고 어린 친구가 들어가니 대화가 원활히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주로 주말에 사복을 입고 결혼을 할 거고 신혼집 알아본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사장님들과 대화도 해보고 어떻게 하면 적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김포 지역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이유는 훈련하는 지역이 김포였기에 몇 년 동안 알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로 신도시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정말 논과 농장 그리고 공장들 뿐이였죠. 임장을 하던 중에 김포에 전철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호재가 있다는 소식을 부동산 사장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죠. 그럼 나중에 좋아지겠구나 싶어서 마음먹고 김포 소형 아파트를 계속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내 첫 번째 1호기를 2009년에 만나게 되었죠. 김포 사우동에 23평의 구축 아파트를 매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장님이 제가 어리바리하고 어리니 구석에 있는 매물을 추천하는데 가격이 싸도 산속에 홀로 있어서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매물을 계속 찾았고 큰 도로 옆이 나중이 지하철이 생겨도 걸어가기 편할 것 같은 단지 위주로 알아보다가 1호기를 만나게 되었죠 개인적인 추측이었습니다. 만약에 생긴다면 김포의 중심축인 48번 국도를 중심으로 생기기지 않을까??


중간 사업 추진이 연기되고 물론 2량짜리 경전철로 쪼그라들 었지만 예상대로 48번 국도를 따라서 골드라인은 들어왔습니다. 지도에서 보면 많은 매물들이 있지만 2009년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죠.


1억 초반에 매물을 매수하고 3천만 원 투자금과 7천만 원 은행 빚으로 매수해서 새입자를 통해 월세 수입(자본소득)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더 공부를 했고 넓게 보았다면 그 당시에 3천만 원 투자금으로 더 좋은 물건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저의 시야는 좁았습니다. 물론 바쁜 업무로 다른 곳을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50만을 받고 계약을 했죠. 당시에 금리가 높았지만 은행 이자를 상환하고 매달 15만 원 ~20만 원의 추가 수입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집값은 오르지 않았어요. 부동산 하락장였죠. 그래도 팔지 않고 보유하면서 월급을 꾸준히 저축을 했습니다. 사실 투자 목적보다 나중에 거주 목적이 그 당시에 더 컸기 때문이죠.


그래서 1호기를 바탕으로 28살이 되던 해에 집 값 상승의 이익과 매달 월세 수입 + 저축을 통해서 1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1호기는 매도를 했지요. 정말 정들었던 아파트였지만 다른 좋은 집주인 만나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실망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또, 부동산 이야기 구나." 하지만 정말 가난하고 평범한 서민이 투자 없이는 시간을 단축해서 부를 축적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30대 후반에 일찍 투자를 시작한  그 노력 덕분에 흙수저 신분에서 조금 벗어난 거 같습니다. 일찍 투자를 한 경험은 계속 투자 공부를 하는 큰 동기부여로 작용했던 겁니다. 당연히 내 집이 있으니 정보 수집에 노력을 더 하게 되고,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 소비 패턴도 달라지게 되었죠.


은행 빚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꽁돈이 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은행빚은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빛 입니다. 나쁜 빚은 아마도 카드 연체료가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책을 보면 종잣돈이 있어야 원하는 부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흙수저에 기댈 곳 없는 청년들에게 1억이라는 돈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요즘 기준으로 솔직히 1억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이 무섭기도 합니다. 집도 살 수 없고, 정말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동차 한 대도 사지 못하는 돈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1억은 큰 돈이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문입니다. 만약에 어린 제가 더럽고 힘든 사회와 현실을 욕하면서 저축도 포기하고 소비 하면서 지냈다면 절대 지금의 자산을 모을 없었을 겁니다. 아마 폭등한 부동산 시장을 보면서 '벼락거지'가 됐다고 한탄했을 겁니다.


만약 완벽한 '욜로'의 삶을 살고 싶은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되지만 저축을 효율적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면 포기하지 말고 지금부터 돈을 바라보는 마인드를 다시 세팅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남의 열매만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것보다 지금은 땅을 파고 작은 씨앗을 심고, 물도 주고, 비료도 주면서 나무가 될 때까지 관심과 노력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절대로 오늘 심은 씨앗으로 내일의 열매를 얻으 수 없습니다. 무조건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자원이 필요하죠. 물론, 운 좋은 몇 명이 통째로 열매가 달린 나무를 선물 받는 모습에 좌절감이 밀려오는 것은 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소수의 행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나무 열매는 1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이유는 나무를 관리하고 씨앗을 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죠. 추가적인 노력을 안 하면 다음 해에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열매의 계수는 계속 줄고 결국 나무는 말라버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도 아닌데 누구를 가르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다만 도움이 될 수 있는 한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글자 한글자 정성을 다해서 남깁니다.


제가 올린 부자는 중고차를 탄다. (brunch.co.kr)  와  부자아빠는 또 중고차를 샀다. (brunch.co.kr) 는 이런 저의 배경에서 나온 소비의 가치관입니다. 두 개의 글은 40만 명의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https://kmong.com/gig/396211

<<부자아빠는 중고차를 탄다. 크몽 전자책>>


 물론, 삶의 가치를 현재에 두시는 분에게는 비판을, 삶의 가치를 미래에 두시는 분들에게는 응원을 받았지만 오늘이라도 자신의 신분이 처참히 밑바닥이라면 그리고 돌파할 혁신적인 두뇌와 기술이 없으시다면 당장 소비의 마인드를 다시 정립해서 하루빨리 도전을 하시면 어느 순간에 안전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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