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당신의 발이되어 걸어가겠습니다
주영헌
당신, 벌써 늦가을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찬란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멀지 않아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계절도 오겠지요 산과 들에, 창문 밖에 훨훨 타오르는 저 단풍잎의 붉은 열기도 휘날리는 차가움에 식어 무채색으로 변해가겠지요 여름 내내 손을 뻗어 허공을 간지럽혔던 잔가지들도 야위어 부러져 버리겠지요 녹음의 푸르름 속에 몸을 숨겼던 작은 동물들도 몸 숨기지 못해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 떨겠지요
늦가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몸 한 뼘 더 어두워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쉬운 것이 많아서, 저 풍경까지도 후회와 아쉬움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왜 이 감정은 이맘때쯤이면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것입니까 내 마음 만족을 모르고 차오르는 삭월(朔月)이기 때문입니까
찬란한 겨울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소박한 식을 올렸을 때,
서로 가진 것이 없어, 빚을 빛처럼 얻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세상의 바람은 삭풍(朔風)처럼 매서웠지만 우리는 참 따뜻했지요 둘만의 열기로도 차가운 방을 훈훈하게 데우고, 추운 겨울은 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봄날, 푸른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요 우리는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봄의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서 긴 잠을 자던 씨앗이 깨어나 꼬물거리며 눈곱만한 이파리를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작은 이파리를 손잡았을 때, 천만년 동안 쌓였던 빙하가 녹는 듯 눈물 흘렀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매서운 추위에 뿌리까지 말라 버렸지만…
언젠가 이겨낼 수 없는 혹독한 추위가 다시 찾아올지 모르지만, 후년의 봄을 기약할 수 있는 까닭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눈비로 질척질척한 땅을 서로의 다리가 되어 건너는 것임을 오래 살다 보니 알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 길 함께 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나에게 고백했던 말처럼, 당신의 발이 되어 걸어가겠습니다
주영헌 시인은...
∘ 시 낭독에 진심인 시인.
∘ 2009년 계간 시인시각 신인상(시), 2019년 불교문예 신인상(평론)으로 등단
∘ 시집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걷는사람) 외
∘ 김승일 시인과 함께 <우리동네 이웃사촌 시 낭독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평일 아침 6시 30분 소셜앱인 <클럽하우스>에서 「시로 시작하는 아침」을 진행하는 등, 시·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