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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헌 Aug 28. 2021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볼 때

단 한음만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다면


무리하게 일을 진행했다가 잘못되었다는 얘기, 지금껏 쌓은 모든 명성을 한순간에 잃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저보다도 훨씬 잘나고 현명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마주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거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벌어진 사건을 복기할 때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많습니다. 이럴 때 “왜?”라는 질문을 같이하게 되죠. 왜 저렇게 무리하게 일을 벌였을까 하는 생각. 제가 모르는 속사정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을 꼭 해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무리한 일임을 알았음에도 뛰어들게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어느 부분의 일에만 매몰되었을 때 듣게 되는 말입니다. 나무를 보는 일이 전부라면 상관없겠지만,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은 어느 한쪽에서 울리면, 다른 한편까지 소리가 전달되는 인드라의 구슬처럼 연결되어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사람과 관계가 틀어질 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과 연결된 다른 사람과도 동시에 틀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기계는 무수한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부품 중에 한두 개의 부품이 잘못 만들어졌다고 합시다. 1만 개 중의 부품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었다면, 이 기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작동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부품이라면, 작동 안 될 것이 분명하죠. 


가끔 집에서 간단한 가전제품을 수리하기 위하여 나사를 풀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부주의 때문에 나사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나사를 4개 죄어야 하는데 하나가 사라진 경우, 그냥 3개만 죄고 맙니다. 그렇게 조립해 놔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나사 하나 빠지거나 또는 생김새가 다른 나사를 죄어 조립하는 것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위급한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나사 하나 때문에 폭발한 우주선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1986년 1월 28일에 일어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그것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는 안일함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나사 하나가 일으킬 수 있는 나비효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비극적인 사건을 ‘미처’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는 미처(as far as)가 아니라 미쳐(crazy)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골몰해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단 한발만 물러서면 볼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장기나 바둑의 '훈수 효과' 같은 것이죠. 정작 선수로 뛸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훈수꾼의 입장에선 잘 보입니다. 나무가 아니라 숲,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3자처럼 객관적인 시각을 숲을 바라볼 수 있다고 누구도 불가능했던 일을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최악인, 말도 안 되는 상황만큼은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극단적인 실패에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2009년에 계간 시인시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6년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시인동네, 2016년)를, 2020년 위로의 시편을 담은『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걷는사람, 2020년)을 출간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편의 산문을 쓰고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공유합니다. 브런치를 통해서는 일주일에 한두편, 재미있는 산문을 중심으로 원문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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