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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1월 중순 어느 날

우리의 2024년/엽편소설

by 그래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바람이나 쐴까,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방향을 잃은 건지 낯선 곳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이래서 사람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보다. 2024년 그저 새로운 것이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2023년 한 해는 우울했다. 직장은 해고되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헤어졌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하루 종일 병원에 매여 내 삶을 포기해야 했다. 긴 병에 장사는 없다는 말이 맞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병원에서 해방된 것은 불과 몇 달 전. 어머니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시고 하늘로 가셨다. 한동안 밥도 물도 넘어가지 않고, 응급실만 몇 번 실려 갔다. 포도당으로 생을 연명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에 의미도 잃어갈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무심코 틀어놓은 TV를 통해 울리는 제야의 종은 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듯이 내 귀까지 닿아 울렸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세상 소리인지 나는 그만 홀린 듯 TV 앞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각각의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기도하거나 웃거나 무표정을 가장해 생각하는 사람들로 마치 내가 그 군중 속에 있는 듯이 생생하게 보였다. 문득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 궁금하다는 생각에 거울을 가져와 쳐다봤다.


살이 빠져 뼈가 보일락 말락, 아무렇게나 묶인 머리, 마른 입술, 퍼석한 피부 시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배꼽이 빠져라 웃던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씻기 시작했다.


말끔한 옷을 입고, 아무거나 보이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 것이 조금 전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외출이었던 것일까? 아님,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외출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내 발걸음은 낯선 곳에 나를 던져두고 말았다.


내가 간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집 근처에 이런 공원이 있었던가? 처음 와 본 공원을 이미 중간쯤 와서야 낯선 곳임을 알아챈 나도 대단했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길래? 피식 웃다 누군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얼핏 본 화면엔 흰 바탕에 까만 점이 보였다. 아마도 글을 읽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살며시 그 옆에 앉아 쓸데없이 좋은 시력으로 그가 읽고 있는 글을 읽었다. 그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에세이이었다.


“같이 보실래요?”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말은 제법 크게 들렸다. 놀란 나는 동그라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얼마 만에 하는 말인지 갈라진 목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여기 물!”


급하게 제 호주머니에 있는 물을 꺼내 뚜껑을 따고 나에게 내민 그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 물을 마셨다. 그의 호주머니에서 미지근해진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 것이라는 것도 잊고 단숨에 한 병을 마신 나는 염치도 없이 빈 병을 내밀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다시 주머니 속으로 빈 병을 넣었다.


“조금 옆으로 갈게요.”


그는 내 옆으로 아주 조금 오더니 핸드폰을 쓱 내밀었다. 한겨울 추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고, 거침없이 읽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따뜻한 느낌이 들어 올려다보니 그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넓게 펼치고 내 어깨에 둘러주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게 쑥스러운지 금세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꼼꼼하게 나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떨고 있어서….”


그제야 알았다. 나는 한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맨발이었다는 것을….


“이, 이제 갈, 갈게요.”


당황함에 서둘러 일어나니 그도 따라 일어났다. 내가 돌아섰을 때 무엇이 급했는지 공중에서 흔들리는 내 손을 잡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뿌리치지 못하고 멍해지고 말았다.


“앗! 미안해요.”


손을 놓아버리자 다시 겨울과 손을 맞잡은 듯 차가워져 갔다.


“댁이 어디예요? 데려다 줄게요? 지금, 이 날씨에 맨발로 다시 왔던 길 돌아가시면 동상 걸리실 거예요.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여기 이것 보세요.”


그가 내민 건 경찰신분증이었다.


“아.”


용감한 시민의 표상. 경찰이라는 직업이 나를 가엽게 여긴 것임을 알고 나니 왜 허망하게 느껴질까?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길을 그가 따라왔다. 어찌 공원 입구까지는 왔는데,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돌아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길을 잃었어요.”


경찰에서 민간인이 된 그는 자신의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 옆에 태웠다. 빠른 속도로 히터를 켜고, 집 주소를 물어보았다. 그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아주 잠깐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은 차로 무려 10분 거리에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감사함을 표시하고 돌아서려는데, 다시 그가 손을 잡았다.


“이게 아닌데….”


뭐가 아니라는 건지. 그는 자기 머리를 제 주먹을 ‘콩’ 때리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저기…. 다, 다음에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러니까 다음에…. 잠시만요.”


그는 급하게 차로 뛰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와 내밀었다. 그것은 자기 전화번호가 찍힌 명함이었다. 아무 반응도 없이 서 있는 날 한참 쳐다보던 그는 세 번째 내 손을 잡더니 자기 명함을 쥐여주고, 행여 놓칠까 손가락을 오므렸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나를 그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대 여자로.”


그 말을 남기고 땅을 보던 그는 쏜살같이 자기 차로 뛰어갔다. 그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한참 웃었다. 처음이었다. 남자에게 대시를 받아본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렇게 귀여운 고백이라니. 그만 한참 웃고 말았다. 배를 잡고 하염없이 웃고 나니 배가 고팠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배고픔에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먹을 게 있던가?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저녁을 챙겨주고, 일과를 묻던 어머니가 죽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웃었던 사람이 맞냐 싶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이제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닦을 힘도 없던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한참 울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그렇게 다시 몇 번의 저녁과 아침을 맞이했다.


그 사이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채웠다. 그것도 영양분은 좀 있었던지 다시 거울을 봤을 때 살이 조금 쪘다. 그날 저녁,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옷을 입었다. 현관문을 열자, 눈이 오고 있었다. 우산을 챙길까 고민하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계단을 내려갔다.


“저기?”


출입문을 나서려는데,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작은 쇼핑백을 들고 눈을 맞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어깨는 젖었고, 머리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여기 죽이에요. 이거 드세요. 제 것 사면서 같이 샀어요.”

“….”


대답 없이 서 있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네 번째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돌려 자기 차로 뛰어갔다. 그런데 그만 바닥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참을 수 없는 웃음에 그만 터지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서 어렵게 일어나 원망스럽게 나를 힐끗 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기우뚱, 나는 얼른 뛰어가 그를 잡아주었다. 그 바람에 나 역시 바닥을 나뒹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는 나를 보던 그가 같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의 머리칼에 묻은 검은 눈을 손으로 치워주었다. 그러자 그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내 손을 다섯 번째 잡더니 자기 가슴에 올려두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신을 좋아하나 봅니다.”


짧은 한마디. 그러나 그 말은 나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2024년 1월 중순으로 넘어가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작성일 : 2023년 12월 어느 날(자료 유실 복구로 정확한 날짜 모름)
출판사 : 포레스트웨일
엽편소설의 발전 : [바람 부는 곳에] 초고
구매처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1876743

눈이 오는 밤, 발을 다친 20대 여자와 그 발을 살펴보는 20대 남자, 서울 한적한 공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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