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의 명절은 어떠신가요/엽편소설
누구는 명절이라 집으로 간다고 월차까지 쓰고 출발했다. 하지만 석호는 갈 데가 없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정신병으로 정신 병원에 있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집을 나가 이때껏 소식도 모른다. 그런 석호에게 돌아갈 고향 같은 것은 없었다.
“김 대리.”
“네. 과장님.”
“술이나 한 잔할까?”
그의 사정을 잘 아는 과장은 꼭 명절 전에 술을 권했다. 하지만 오늘은 술이 당기지 않았다.
“아뇨.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거짓말인 줄 알면서 과장은 모른 척 알겠다며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하나둘 자리가 비워지고 사무실이 텅 빈 시간은 평소 퇴근 시간보다 1시간 늦은 시간이었다. 모든 조명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네. 저 작은 사람들은 다들 고향으로 가겠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는?”
그의 나이 이제 스물하고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단어도 어머니라는 단어도 낯선 그에게 명절은 끔찍한 휴가 기간뿐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내 자리에 노트북을 열었다. 밀어둔 일을 시작했다. 굳이 오늘 할 필요도 없는 일들을 하나둘씩 처리해 가면서 긴 하루의 끝을 향했다.
“어이쿠. 김 대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60대 경비 아저씨가 지나가다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발견했는지 순식간에 사무실에 환한 불이 켜졌다.
“불이라도 켜고 일하시지.”
“아닙니다. 혼자 있어서 괜찮아요.”
“김 대리님, 10시까지는 나가 주셔야 해요.”
“네. 그럴게요.”
경비아저씨가 나가고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0분. 인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처리한 일은 오른쪽에 두고 해야 할 일은 왼쪽으로 모아 두었다. 이미 3분의 2는 다 처리했다. 양복 겉옷을 걸치고 넥타이는 풀어 가방에 넣었다. 힐끔 창밖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한산해져 있었다.
“명절이라는 건가?”
긴 날숨을 내쉬고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동 삼아 차를 두 정거장 뒤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두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보낸 명절이 몇 해가 되건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아버지가 병원에 들어간 게 5년 전이다. 석호가 성인이 되던 해 보호받는 처지에서 보호자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전에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 속에서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는 삶을 살았다.
“명절이라서 그러는 거야.”
괜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럽다고 생각한 석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지러운 생각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 빨리 걸으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막 차에 도착했을 무렵 자신의 차 앞에서 서성거리는 한 인영이 보였다.
“누구신데…?”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신의 차 상태가 보였다. 앞 범퍼가 찌그러져 있었다. 마치 정면으로 들이박았는지 앞쪽이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내… 차.”
“죄송해요. 제가 초보운전이라 액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리고 말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또래에 여성이었다. 그녀는 150을 조금 넘길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몸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까만 안경에 서리가 낄 정도로 현재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보험 회사는 불렀습니까?”
“보험 회사 요? 어떻게 불러요?”
“하아. 가입은 하셨어요?”
진짜 초보 운전이 맞는 건지 바로 앞쪽에 세워진 빨간 마티즈 차량의 앞 범퍼도 박살이 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깨달은 건지 자기 자신의 차로 가 문을 열려고 했다.
“왜 안 열려요?”
울상인 그녀가 석호를 보며 울 듯이 말했다.
“안 열려요.”
석호는 굳이 열리지 않는 보조석 말고, 자신이 내린 운전석으로 가면 되지 않나 생각하다 당황했으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움직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차로 걸어가 자연스럽게 운전석을 열어 보조석 앞에 서랍을 열고 보험 증서를 꺼내는 석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호는 그녀에게 걸어서 증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받아요.”
“네?”
여전히 이해 못 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증서에 적힌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집어주며, 전화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래요?”
“아니에요. 잠시만요. 저기 죄송한데, 전화기 좀 빌려주시면 안 돼요?”
“네?”
“사실은 전화기를 두고 와서 선생님께 전화를 못 한 거거든요.”
그녀의 말에 석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해결해야 하는 문제부터 해야 했다. 그녀는 석호의 전화기를 받아 들고 증서는 확인도 하지 않고 누군가에 전화를 걸었다.
“형부, 저 미진인데요. 저기, 죄송한데 여기 와 주시면 안 돼요?”
저기 너머에서 걱정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큰 사고는 아니고, 제가 접촉 사고를 내서…. 네. 네. 그럼, 기다릴게요.”
석호는 보험사를 부르라고 했더니 형부를 부르는 그녀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피하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부가 보험사에 있어요. 아마 알아서 같이 오실 거예요.”
잠시 후에 온 사람은 왠지 낯설지 않은 남자와 또 다른 남자 이렇게 두 사람이 왔다.
“처제! 이게 가벼운 거야? 와, 차가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형부라는 사람은 한참 주위를 둘러보더니 석호의 차량을 조회했다.
“우연이네요. 제가 설계한 분이시네요.”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했더니 석호의 차 보험을 설계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알아서 석호의 보험사에도 연락해 사고 수습을 맡겼다.
“그럼, 보험 처리 원하시죠?”
“아무래도 그게 낫지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죠.”
그녀의 형부 일 처리는 확실했다. 명백하게 자기 처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그럼 댁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전철도 끊어지고, 버스도 없었다. 집까지 걸어서 간다면 2시간이 걸릴 테지만, 석호는 거절했다. 괜히 불편하게 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는데, 차가 출발했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소리.
“저 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네?”
이 여자는 석호가 무섭지도 않은지 당돌하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데려다 달라고 하세요?”
“저는 알아요. 당신 지켜봤으니까.”
“네?”
그녀는 석호 옆에 나란히 서며 웃었다.
“저는 23살 이미진입니다. 현재 대학생이고, 집은 석호 씨 건너편에 살아요. 그리고 저는 당신 알아요.”
“네?”
“OO고등학교 나오셨죠?”
“네.”
“저도 거기 나왔어요. 저 거기서부터 쭉 석호 오빠 좋아해요.”
“네?”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석호가 잃어버린 키링을 꺼냈다.
“여기 이거요. 이거 돌려주고 싶었어요. 오빠 주려고 보관했어요.”
“오빠?”
석호는 생전 처음 자기 돈으로 샀다. 그런데 그날 잃어버렸었다. 고작 500원짜리 장난감 키링. 동네 문구점에서 구매했다. 이유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날도 아버지한테 폭언을 듣고 기분이 바닥이었을 때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고, 마침 보인 게 그 키링이었다.
“여기요 받으세요.”
미진은 석호와 나란히 걸으면서 자신이 석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정말 차는 살짝만 긁히려 했는데, 실수였다고 미안하단다. 석호와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저지른 행동치곤 대형 사고였다.
“저는 여유가 없어요. 아직 누굴 만나기 위한.”
“괜찮아요. 옆에 있게만 해줘요. 저도 학생인걸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저도 어린걸요.”
미진은 그렇게 석호 옆에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석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이 연인이 된 것은 미진이 28살이 되었을 때였다. 석호는 그녀에게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미진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처음 만난 그날처럼 웃었다.
작성일 : 2023년 12월 어느 날
출판사 : 포레스트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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