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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소풍날, 아침

소풍 끝에 남은 기억/엽편 소설

by 그래

미영은 해도 뜨지 않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세수부터 했다. 밀려오는 잠을 뿌리치고 그녀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전날 미리 썰어둔 재료를 꺼내놓고, 빠진 것은 없는지 둘러보았다. 햄, 맛살, 어묵, 시금치, 당근, 계란물 괜히 소리까지 내며 읊었다. 냉동 코너에 항상 있는 김을 꺼내다가 밥통을 확인했다. 다행히 2시간 전에 완료 예약만 밥은 알맞게 꼬들거렸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아주 조금만 뿌리고, 잠시 적당할 때를 기다렸다. 그 사이 계란물을 젓가락을 휘휘 적으며 밤사이 바닥에 가라앉아버린 소금을 녹였다. 드디어 예열을 마친 프라이팬 위로 계란물을 착 뿌리자 ‘칙’ 소리와 함께 빠르게 익어갔다. 중간중간 끄트머리를 들어 올리며 익은 정도를 파악하다 적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뒤집었다. 가끔 두 동강이 날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예쁘게 뒤집어졌다. 기분 좋게 불을 끄고, 잔열로 익을 달걀지단을 기대하며 밥을 꺼내 볼로 옮겨 담았다. 아직은 뜨거운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휘’ 둘러 섞어 잠시 두었다.


약간 식은 달걀지단은 도마로 옮기고, 야채를 하나, 둘 볶았다. 약간의 소금, 적당한 식용유 다른 건 필요 없는 간단한 요리가 시작되었다. 아직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재료를 넓은 쟁반에 순서대로 옮겨 담고, 마지막으로 단무지를 꺼내 담긴 물을 뺐다. 최대한 물기가 남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다른 재료와 섞이지 않도록 한곳에 두었다. 이제부터는 김부터 밥, 단무지, 햄 등 재료들을 넣어 돌돌 말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처음엔 뚱뚱하고, 터지던 것이 이제는 김밥 말이 없어도 적당한 크기로 예쁘게 말렸다. 김밥이 너댓가가 모이면 두 아이가 문을 열고 미영을 부른다.


“엄마! 괜찮아?”

“뭐가?”


첫째 민서는 나오자마자 미영을 부르더니 창밖을 쳐다봤다. 어제 흐린 날씨 탓에 밤새도록 비가 올까 봐 하늘을 보고 또 보았더랬다. 다행히 화창하게 맑아진 하늘이 마음에 들었는지 믿지도 않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


“엄마, 나 김밥 하나만 먹으면 안 돼?”


둘째 민재가 입을 쩍 벌리고 앉아 김밥을 가리켰다. 오늘 김밥 첫 개시는 아무래도 둘째가 될 모양이었다. 막 한 줄을 자르고, 민재 입에 넣어주려고 할 때 커다란 손이 김밥을 전부 집어 들었다. 남편이 언제 나온 건지 민재를 놀리며 말했다.


“이거 맛있는데, 아빠가 다 먹어야지.”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잘라놓은 김밥을 양손에 쥐고 한 손에 든 김밥을 모두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겨우 5살밖에 안 된 아들을 놀리는 남편은 진심이었다. 둘째의 울음소리에 씻으러 들어간 민아가 나와 아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빠가 그러면 안 되지. 오늘 김밥은 우리 때문인데, 당연히 우리가 먼저 먹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첫째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남편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혀만 쏙 내밀고는 문을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데, 못한 게 아쉬운지 민서는 씩씩거리며 방을 쳐다봤다. 7살이 되더니 야무진 입으로 곧잘 장난기 가득한 아빠가 못마땅한 민서였다. 민서는 오늘도 바람 잘난 없는 집이라며 어른처럼 혀를 쯧쯧거렸다. 조그마한 게 어른 흉내를 내는 게 귀여웠지만, 어른에게 혀를 찼다는 건 아닌 것 같아 주의를 주었다. 또 잘못은 바로 수긍하는 똑 부러진 딸이다.


“엄마, 나는 김밥에 김치 넣어주면 안 돼?”


요즘 김치에 푹 빠진 민아의 말에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제 말해주지. 지금은 안돼. 갔다 오면 엄마가 남은 재료로 만들어줄게.”


그저 김치만 추가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이다. 김치를 김밥 재료를 쓰기 위해선 일단 물기 제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로 넣어달라는 말이 아니다. 민아는 볶음김치를 좋아했다. 그래서 양념하고, 볶고 또 식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민아에게 그 과정을 말해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이가 커 가면서 설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는 것 같다.


“엄마, 나는 햄, 햄이랑 계란만 넣어줘. 야채는 싫어.”

“그건 해줄 수 있어. 그런데 야채 넣은 김밥도 먹어야 해. 먹는다고 약속하면 만들어 줄게.”


5살 민재에게 아주 큰 고민인 듯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료를 만들다 부러진 햄 조각과 시금치 조금을 집어 민재 입에 쏙 넣어주었다. 민재는 오물오물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눈을 감더니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응. 생각보다 맛있는데!”


진짜 입맛에 맞았는지 시금치만 한 줄 골라 입에 넣고는 미리 꺼내 놓은 유치원 원복을 입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순간 세수는 했던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김밥이 우선이었다. 민재가 옷 입는 것을 본 민서는 굳이 동생 옆에서 같이 옷을 입었다. 옷 입는 중간중간 민재가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지 힐끔 보면서 잘못 입으려고 할 때마다 고쳐주는 모습이 제법 누나다웠다. 옷을 다 입고, 혼자 머리 묶기는 힘들었는지 대충 빗고는 오늘 사용할 고무줄을 가지고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


“엄마, 오늘 간식은 뭐야?”

“방울토마토하고 키위랑 바나나.”

“과자는?”

“초코송이랑 수박 젤리랑 죠스바 젤리.”


짧은 면담이 지나고, 도시락을 싸기 위해 서둘렀다. 오늘은 곰돌이 도시락이 민아 차지가 되었다. 원래는 토끼 도시락이 민아 거였지만, 얼마 전 동물 체험에서 토끼를 본 후 굳이 오늘은 민재가 토끼 도시락을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민아가 특별히 양보했다. 유치원에 가져가기 위해서는 껍질째 먹을 수 있거나 껍질을 벗겨서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과일들을 차곡차곡 넣어둔 다음, 역시 비닐을 벗긴 과자와 젤리를 두 아이의 도시락에 나눠 담았다. 젤리가 생각보다 적어서 미영이 먹고 싶어 산 포도 젤리까지 넣어 빈 곳을 채웠다. 남은 칸은 아이들 입 크기를 고려한 작은 김밥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 물었다.


“김밥 꽁다리 가져갈 사람?”


유독 김밥 꽁다리를 좋아했기에 꼭 물어봐야 했다. 저번에는 꽁다리가 없었다고 민아가 아쉬웠다고 다음엔 넣어달라고 미리 말했지만, 기억력이 그리 길지 않은 아이들이라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민재는 고민도 없이 넣어달라고 했지만, 정작 넣어달라고 했던 민아가 고민한다.


“엄마, 나는 한 개만.”

“그래. 알았어.”


미영은 질문하기를 좋아했다. 항상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과자도 직접 고르게 했고, 유치원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부모의 영역과 아이들이 직접 해야 하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중이다.


“여보, 내 것도 있어?”

“당연하지. 여기.”


오늘은 남편도 특별히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미영의 김밥은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처음엔 양 조절 실패로 가져간 김밥 도시락이었지만, 지금은 남편조차 소풍을 기다릴 정도로 미영의 김밥은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 가방을 열고 도시락을 넣고, 물과 음료수를 챙겼다. 음료수에도 각자의 이름표를 붙인 다음 미리 은박 마개는 제거한 후 다시 뚜껑을 닫아두었다. 이제부터 남편의 몫이다. 아빠의 양손은 이미 두 아이가 한 손씩 잡고 있었다.


“다녀올게.”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휴일을 제외한 매일 한결같은 인사에 웃음이 나왔다. 남편과 가볍게 하는 키스에 민재가 눈을 가렸다. 반면 민아는 ‘또 한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민아의 뺨에 뽀뽀하며 ‘잘 다녀와. 딸”이라는 말에 괜히 좋으면서 삐져나오는 미소를 감춘다고 어색한 미소가 생겼다. 반면 민재는 제 순서가 되었다며 미영을 재촉했다. 한껏 나온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하고, 미영과 포옹까지 마친 민재가 이제는 아빠를 재촉했다. 막 일어서려는 미영의 귀에 남편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사랑해. 갔다 올게.”


늘 같은 레파토리, 같은 인사, 같은 속삭임이지만 행복하기만 했다. 가끔 싸워서 밉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과 7살 어른이 민아, 마냥 어려 보이는 귀염둥이 민재까지 오늘의 평화가 참 좋다. 따뜻한 봄 날씨, 두 아이의 소풍도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나길 바란다.



작성일 : 2025년 04월 25일

키워드 : 소풍과 기억 중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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