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끝에 남은 기억/엽편 소설
가끔 기억은 기억하고 싶은 사람에 따라 왜곡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어 애써 기억을 조착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억 자체가 싫어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다 만난 사람이 아는 사람인데도 낯설 때가 있나 보다. 오늘 겪었던 일은 참 황당하기도 했지만, 기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나는 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본 적도 없고, 아예 이름부터 낯설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에게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친한 척 굴고 있다.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나버려 마음은 급한데, 좀체 놓아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때 너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네?”
본인은 친했던 친구였다고 반말하지만, 여전히 어색한 높임말을 하는 나를 보면서 조금은 깨닫지 않을까 싶지만 눈치도 없이 웃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보고 호박 같다고 했잖아. 늙은 호박.”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으로 바꾼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네 덕에 나 졸업할 때까지 늙은 호박으로 불렸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면 다야?”
딱 한 걸음만큼 거리로 서 있던 그녀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그녀가 자세히 보였다. 참 예쁜 얼굴이었다. 달걀형의 얼굴은 늙은 호박처럼 넓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쌍꺼풀이 진 눈매는 선과 악을 동시에 품은 듯한 묘한 매력이 있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오뚝한 콧날과 매끈한 입술은 그녀가 천사 같은 미소 속에 다부진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기억나지 않아서 그래요. 누구세요?”
“얘가 끝까지 모른 척하네.”
그녀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갔다. 한적한 평일 오후였지만, 그녀와 내가 서 있는 곳은 서울에서도 꽤 번화가에 속했다. 그랬기에 몇몇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목소리의 근거지를 찾아 삼삼오오 모이고 있었다. 어느새 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두고 삥 둘러섰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소리쳤다.
“너 00 고등학교 나왔지?”
그녀가 말하는 고등학교는 내가 전학 가기 전 잠깐 머물렀던 학교였다. 고작 한 달 남짓, 입학과 동시에 지방으로 전근발령을 받은 아버지로 인해 부랴부랴 급하게 이사와 전학이 이루어져 그곳에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그곳을 졸업했냐고 묻고 있었기에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뇨. 거기 졸업 안 했어요.”
나의 대답이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모르겠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와 이어서 해야 했던 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어디서 거짓말이야? 너 이선화 맞잖아!”
“이선화? 그 사람이 누군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기억하는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마도 학교는 우연이 겹친 것 같았다. 자꾸만 아니라고 하는 나를 믿지 못하는 그녀에게 결국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주민등록증 속에 내 이름은 ‘윤민희’다.
“정말 윤민희 맞아? 아니 세요?”
“네. 보고 있으시잖아요. 여기 00년생 윤민희, 보고도 못 믿으세요?”
“혹시 개명?”
참 어이없는 발상에 웃음이 나왔다. 그때 오늘 약속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약속한 친구가 00 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참 아이러니한 우연인 듯 하다.
“진우야, 미안해. 나 지금 거의 다 왔는데, 황당한 일을 겪어서. 내가 가서 설명해 줄게. 진짜 미안해. 뭐? 알고 있다고? 너 어디 있는데?”
그때 대중 사이에서 진우가 나왔다. 혼자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모습이 얄미웠다. 아마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내가 걱정되어서 약속 장소에서 지하철역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 같았다. 한참 웃던 진우가 짐짓 헛기침하며 내 옆에 섰다. 나름 남자라고 어깨의 힘을 주는 모습이 웃겼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가다듬으며 듬짐한 남자의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사과부터 하시죠. 제가 처음부터 본 건 아니지만,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시는 모습은 봤거든요. 처음 본 사람한테 할 행동은 아닌 듯한데? 아닌가요?”
진우의 말에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허리까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확실하게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네요. 너무 닮으셔서 저도 모르게 착각했어요. 진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다행히 멱살은 안 잡았으니 그걸로 ‘퉁’ 치죠. 저라면 그냥 보자마자 멱살부터 잡았을 것 같거든요. 보아하니 상처 많이 받으신 듯한데, 이해해 드릴게요.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등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진우는 웃음을 참느라 바람 빠지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한참 몇 번 큰 심호흡을 한 후에야 그녀 앞에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00 고등학교라고 했나요? 저 거기 출신입니다. 이 친구는 아니지만. 당신한테는 저는 ‘선배님’이 되겠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마시면서 당신이 말하는 그 선화라는 친구와 있었던 일 들어보고 싶은데 어때요?”
그녀는 진우의 말에 망설였다. 아마 그냥 완전히 모르는 남이었다면 괜찮다고 돌아섰을 거로 예상되지만, ‘선배’라는 말이 망설임을 주는 것 같았다.
“선배라는 단어에 너무 부담가지지 말아요.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 지금 어디 가시는 중 아니었어요?”
“아니요. 어디 가려는 중은 아니었고, 잠시 산책 중에 우연히 본 거예요. 정말 닮으셔서―.”
얼버무리는 말속에 알 수 있었다. 말하고 싶은 욕구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뒤엉켜있다는 것을 말이다. 문득 나보다 어리다고 했는데, 그녀는 몇 살인지 궁금했다.
“혹시 몇 살이에요? 내가 연상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궁금해서요.”
“아, 저는 스무살이에요. 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진짜 맞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괜히 나이를 물었나 싶을 정도로 사과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
“그래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사과는 충분히 받았으니까. 그러면 우리 헤어질까요?”
“아무래도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만 잊을래요.”
“잊는다고요?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일 만큼 상처받은 말인데?”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친구는 농담이고, 장난이었을 텐데요. 뭘. 선화는 저와 제일 친한 친구였으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그 말은 화병처럼 마음에 남아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미움이 된 듯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듣고, 그 말로 인해 듣기 싫은 말을 졸업할 때까지 들었으니 그녀에게는 상처와 미움의 대상이었겠지만, 반대로 일방적으로 연락하지 않고 피한 친구로 인해 선화라는 그 친구도 꽤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봤자 내가 해결해 줄 문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오해를 풀고 사과할 건 하고, 풀건 풀어야지 끝날 문제였다.
“그래요. 혹 다시 그 선화라는 친구 우연히라도 만나도 지금처럼 말고 대화로 잘 풀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모습 보면 당신도 그 선화라는 친구가 그리운 것처럼 보이거든요.”
“맞아요. 그리워요. 그 친구처럼 제일 말이 잘 통하는 친구를 또 만나지 못했거든요. 고맙습니다. 선배님의 충고 명심하고 그대로 실천할게요. 오늘 정말 죄송하고, 저는 먼저 가볼게요.”
울먹이며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참 기억이란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거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진우는 오늘 만남 내내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짐짓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는 고등학교 때 나 어떻게 기억해?”
“너? 당연. 그냥 오진우.”
“그래? 그냥 오진우? 그게 다야?”
“응. 넌?”
“나도 뭐 다르겠냐? 그냥 윤민희지 뭐.”
괜히 툴툴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에 더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배고팠다. 먼 여수에서 진우 이 자식을 보겠다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까지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작성일 : 2025년 04월 25일
키워드 : 소풍과 기억 중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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