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미의 전언

하루시

by 그래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무슨 글을 쓸까 고민했다. 요즘 에세이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에세이를 쓸까 하다가 시를 썼다. 그런데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상징적인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랬듯 내가 느끼고 바라는 것을 쓰고 싶었기에 고민은 길어졌고, 며칠 전 쓰다 내버려 둔 글부터 수정했다.


다시 시작.

불현듯 떠오른 시가 있다.


아이야

너는 뭐가 그리 좋아
빙글 돌며 춤을 추느냐?

너의 보물이 소중하여
두 손 꼭 쥐고 행복한 모습이
나조차 절로 웃음이 나게 하는구나!

네 춤을 보고 있으니
내 시름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나도 너처럼 행복하구나!

아이야!
빙글 돌며 춤을 추거라.
세상 시름 다 잊어버리게
내게 웃음을 보여 다오.


이 시는 첫 시집[사람을 부르는 이름들]에 수록된 글이다. 4살, 5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보며 쓴 글이기도 하다. 한 손에 과자봉지를 들고 신난 모습이 귀여워 한참 넋을 놓고 보았다. 그 자리에서 아이를 보고 느낀 점을 써 내려갔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아이야'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에는 어린이날이 제일 싫었다. 친구들은 어린이날이라고 자장면도 먹으러 가고, 선물도 받았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나는 어린이날 선물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늘 바쁜 부모님은 정신이 없었고, 유독 칭얼거리지 않는 자식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칭얼거리지 않는 건 자식 많은 집안에서 관심받는 걸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때는 그걸 모르는 나이었고, 그게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방법이라 여겼다. 외로움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고, 혹여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현혹되기 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과 악을 구분 못하는 건 아이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아 오히려 경계만 늘었다.


지금 부모가 된 지 20년이 되었다. 관심을 줄 아이들은 다 컸지만, 그래도 나의 눈길은 항상 아이에게 멈춰있다. 내가 받지 못했던 관심은 항상 아이들에게 쏠렸고, 혹시 더하다가 넘치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나름 방어벽을 세우고 바라보게 했다. 무심하게 들어주고, 무심하게 조언하였다. 직접 선택하게 해주는 여유는 참 어렵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본인이 질문하고 답조차 본인이 찾았다는 걸 눈치 재지 못하는 아이들의 환호성은 나름 웃음을 주기도 했다.


문득 아이들이 어릴 때가 생각난다. 일부러 어린이날이 되면 유독 아이들을 이끌고 슈퍼나 문구점을 갔다. 5월 5일 어린이날 한정 상품, 무료과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출도 있기는 했지만, 공짜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평소 엄마가 사주지 않는 간식에 행복해 했었다. 이 날은 슈퍼나 문구점 한정도 아니었다. 과일가게도 채소가게도 아이를 보고 덤을 챙겨주었다. 자녀를 대동한 엄마 한정은 푸짐한 밥상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오늘 5월 5일 어린이날이라고 들뜬 아이는 없다. 큰 아이는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며 괜한 심술도 부렸다. 둘째는 고등학교생을 위한 청소년날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현타가 왔는지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젠 특별하지 않은 오늘이 유달리 달리 보이는 건 최근 알게 된 지인 때문인 것 같다. 그분의 생일이 바로 어린이 날이었다. 예전에는 오롯이 축하받지 못했다는 그분에게 오늘은 어린이날 이전에 당신이 태어난 특별한 날이니, 마음껏 행복하라고 말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인이지만, 정말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기념일, 특별한 날이 생일인 사람이 내 주위에는 많다 추석이 생일인 내 친구, 매번 중간고사 기간이 생일이었던 나 오로지 나를 위한 날임에도 제대로 축하받지 못한 설움은 크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생일은 어릴 때는 특별함을 지니지만, 나이를 먹으니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 지는 것 같다. 나는 올해 내 생일도 몰랐다.


5월 5일, 모든 어린이에게 생일선물이 전해지길 바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생일만큼 특별한 그들의 날이니까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도 사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