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 동아리 조각글 키워드 소란
우리 반에는 김현미라는 친구가 있다. 현미는 반장인데, 늘 꼿꼿하게 앉아 까만 안경을 콧등으로 떨어지면 왼쪽 중지로 슬쩍 올린다. 긴 생머리는 항상 윤기 나게 빗질되어 있고, 앞머리 하나도 가지런하게 일자를 유지한다. 성적은 항상 우수하고, 답은 항상 짧고 간결하게 필요한 말만 한다. 반 친구들은 현미가 있든 없든 AI일지도 모른다며 일부러 웃긴 표정을 짓기도 하고, 짓궂은 농담도 하지만 현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자기 할 일만 한다. 나는 그런 현미와 제일 친한 친구다.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현미야, 미안한데, 오늘 같이 못 가겠다. 동아리 쌤이 일지 정리해 놓으래.” “어. 괜찮아. 나 먼저 갈게.”
현미는 나를 기다리겠다고 펼쳐둔 책을 덮고, 가슴 위로 올렸다. 170이 넘는 키 때문인지 교복을 입고 있는데도 대학생처럼 보인다.
“먼저 갈게. 내일 보자.” “어. 그래.”
앞문으로 나간 현미를 멍하니 보다 서둘러 뒷문으로 동아리 방에 뛰어갔다. 그런데 수호천사 남자 친구 민호가 벌써 일지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가자. 내가 다 했어. 동아리 쌤도 가라고 했어.” “정말?” “어. 걱정하지 말고 갑시다. 현미는?” “먼저 갔어. 노래방은 우리 둘이서 가자.” “그래.”
민호와 함께 학교 앞 코인노래방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래방에 하나쯤 있을 법한 악만 써대는 손님의 존재감이 커진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저절로 발이 움직이게 한다. 흐릿하지만 벗겨진 필름지 너머로 현미? 가 보였다. 아니 현미가 맞은가? 내가 본 현미가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목 아래 단추가 두 개는 풀어져 있고, 치마는 대충 무릎 위로 올라와 있었으며, 책과 가방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넥타이는 풀어져 가방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떨어질 듯 아스라이 걸려 있다.
현미는 고음 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목소리가 예쁘다. 그러나 지금 크라잉넛에 ‘말 달리자’를 부르는 현미는 완전 고삐 풀린 망아지다. 음정 박자 다 무시하고, 소리만 지르는 것이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민호가 잡아당긴다.
“내버려 두자. 재도 사람이었네. 오늘 일은 우리 평생 비밀로 하자.” “그래. 그러자. 이젠 진짜 친구가 되어줘야겠다. 언젠가 내 앞에서도 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좋겠네. 아휴.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도 부르자.” “뭐?” “‘말 달리자’ 이거 스트레스 쫙 풀어주네.” “응.”
나는 민호와 함께 현미가 그런 것처럼 노래방의 빌런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기어코 노래방 사장님을 호출하게 되었고, 밖으로 쫓겨난 사람은 나와 민호 그리고 현미였다. 현미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나와 눈이 맞주쳤다. 아내 붉은 뺨이 상기되면서 현미를 만난 이래 제일 예쁜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