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흔적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랑하는(사. 사. 사.)

건전예술방 온라인 크리스마스합작 단편소설

by 그래

“나, 너 좋아해.”

그가 나에게 말한다. 나는 답할 수가 없다. 무엇도 그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오늘도 못 들은 것처럼 다른 말을 한다.

“수학 42페이지, 오늘 쪽지 시험 본다고 했는데, 너 어제 결석해서 모르지? 잠깐만 있어봐 봐.”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아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를 좋아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도 그만 봤다. 하기 싫은 공부도 그가 좋아하니까 하는 거다. 그런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가 빨리 죽는단다. 하필이면 난 왜 일찍 집에 갔을까? 집에 그가 없는 걸 알면서 왜 그날 그의 집에 갔을까? 현관문 앞에서도 다 들리도록 들리던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이 집 딸년과 있으면 네 아들은 일찍 죽을 거야. 내가 무당이야.”

왜 난 그걸 직접 들어서 엄마도 그의 엄마도 믿지 않는 걸 내가 믿고 있다. 민지가 같이 놀다가 가자고 했을 때 평소였다면 놀았는데, 왜 그날은 무시하고 집에 왔을까? 왜 하필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그날, 하필 그날.

“나, 왔어. 들을 준비 됐어. 해.”

“응?”

나는 그를 빤히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어떤 말도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 노란 장미 갖고 싶어.”

“응? 갑자기 웬 노란 장미?”

“노란 장미 갖고 싶다고. 사 줄 거야?”

“사주는 거야 사 줄 수 있지.”

그는 단숨에 근처 꽃집으로 달려간다. 사람이 너무 슬프면 한쪽 눈만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알아버렸다.



오늘 그녀가 고백하는 줄 알았다. 멋은 하나도 모르는 친구 두 놈과 난생처음 남성 옷 전문 매장을 열 군데도 넘게 돌아다녔다. 모델처럼 옷을 벗고, 입고 수십 번 더 해서 새 옷도 샀다. 어떻게 답할까, 대답도 연습하고, 꽃을 사 갈지 아니면 선물을 살지 고민하고 고민해서 작은 선물도 사서 호주머니에 그대로 있다. 그런데 노란 장미라니. 어차피 을은 나다. 갑이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 을이 아닌가. 다행히 걸어오는 길에 노란 장미를 파는 꽃집을 보아 다행이다.

“노란 장미 주세요.”

“노……, 란 장미요?”

“네.”

“좀 전에 고백하러 가신다고 친구하고 통화하지 않으셨어요?”

그녀에게 가는 길에 친구와 통화하면서 갔는데, 그걸 보았나 보다.

“네. 그 친구가 노란 장미를 갖고 싶다고 하네요.”

“이상하네. 여자들은 대부분 알 텐데.”

“뭘요?”

“노란 장미 꽃말이 뭔지 아세요?”

“네?”

“한번 찾아봐요.”

장사는 안 하고, 꽃말을 찾으라니 이상한 사장이다 싶으면서도 궁금함도 생긴다. 나는 핸드폰에 뜬 꽃말을 보고 그대로 나왔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건 줄 수 없다. 아무리 그녀가 노란 장미를 갖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건 줄 수 없다. 아니, 주더라도 내 손으로 줄 수는 없다. 절대.

“왜 빈손이야.”

그녀는 바보다. 붉은 눈을 분칠 몇 번으로 가려진다고 생각하는 바보다.

“없대. 다 팔렸대.”

꽃집 앞에 있던 노란 장미가 가득 담긴 통이 사라졌다.

“비싸서 안 산 거야?”

“비싸 봐야 꽃 가격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아, 배고프다. 밥 먹자.”



그는 진짜 배가 고픈지 내 손을 잡아 학창 시절 자주 가던 분식집으로 들어간다. 늘 먹던 떡볶이와 국물 가득 어묵과 바삭한 튀김까지 초등학생용 작은 테이블이 가득 찼다. 많이 배가 고팠던 걸까? 허겁지겁 그릇을 비워대는 그가 아무 말도 없다.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씹고, 삼키는 것만 집중한다.

“진짜 배고팠어?”

우물우물 뭔가 말하는 입 사이로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어묵 한 조각이 접시 위로 툭 떨어진다.

“안 먹어. 더럽게.”

보통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게 꼭 맞는 순서다. 그런데 말이 없다. 잠시 멈춘 반복된 행동을 계속할 뿐이다.

“치! 나 갈래.”

이번엔 예정대로 할 거라는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는 잡지 않는다. 당황한 것보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일단 거기서 나온다. 그래도 잡으러 올 거라는 기대를 안고 서 있는데, 분식집 이모가 부른다.

“아가씨, 잠시만.”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방학에도 다녀간 나와 그였다. 그 몇 년 사이 잊었나 보다.

“자!”

불쑥 내민 오래되고 낡은 종이, 흐릿한 글자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내가 너 기억 못 할 줄 알았지? 요것아, 완전히 아가씨가 다 됐네.”

“이모는 더 젊어진 것 같은데?”

“어른 놀리는 솜씨는 여전하네. 요거 이모가 너한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아주 많이 올 거라고 하더라.”

가게로 들어가는 아주머니의 어딘지 여운을 주듯 끌리는 말투가 걸린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많이 오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지금 중요한 건 해석하지 못한 포스티지다. 한참 쳐다보다 겨우 찾은 건 그의 이름 두 글자다.

“유례카.”

다음을 해석하고 있을 때 다 먹고 어묵 국물을 홀짝이며 나오는 그가 보인다. 서둘러 포스티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게 뒤로 숨는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바보가 확실하다. 분식집은 코너링 도로라 미처 보이지 않는 구간을 보여주기 위한 거울이 있다. 그녀도 아는 사실일 텐데, 자기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안심한다. 나도 모른 척해야 한다. 그녀를 만나고 평생을 을로 살아온 습관은 이런 중요한 순간에도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벽에 기대서 보고 있는 쪽지가 신경 쓰인다.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쪽지를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도 보고 저럴까?

“자, 옜다. 너도 준다. 넌 이거. 또 와.”

“네. 이모.”

이모가 준 건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크리스마스 때 쓴 비밀 편지다. 20살 크리스마스 때 찾으러 오겠다고 이모한테 단단히 일러두고 벽도 아닌 천장에 붙여둔 포스터지. 이번 크리스마스가 바로 20살이 되어 맞는 첫 크리스마스다.

[20살 크리스마스 때 눈이 오면 우리 사귀는 거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쪽지! 그렇다는 건 그녀가 보고 있는 쪽지는 내가 적은 쪽지라는 거다. 거기에 내가 뭘 썼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뭘 썼지?



나는 해가 떨어지도록 분식집 뒤에 숨어 쪽지를 노려보았다. 흐릿하게 연필로 쓴 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겨우 찾은 건 ‘우리’라는 두 글자가 전부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지워진 글을 읽으려 노력하다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연락도 없는 것이 늦어서 한 시간이 넘도록 잔소리를 듣는다. 얼핏 옆집 그의 방이 환하다. 결국 꿀밤 한 대를 추가로 맞고 내 방으로 올 수 있었다. 다시 쪽지를 본다. 꾹꾹 눌러쓴 자국만 남은 쪽지. 꾹꾹?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올려두고 연필을 쓱쓱 그어 비어진 공간의 글자를 읽어간다. 한 글자씩 모습을 드러날 때마다 눈물이 찬다. 결국엔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어버렸다.

“오늘 눈 많이 온대.”

“근데?”

“가자. 너 눈 쌓인 날, 첫 발자국 남기고 싶다며? 네 소원이었잖아. 그 소원 오늘 이루어진다.”

“싫어. 안가.”

“아니. 가. 너는 갈 거야. ”

오늘따라 그가 갑 행사를 한다. 매번 을처럼 굴던 그가 갑 행사를 하니 속수무책이다. 그가 이렇게 힘이 셌던가? 팔목이 아리도록 끌려듯 간 곳은 집 뒤에 작은 놀이터다. 그와 어릴 때 자주 놀던 놀이터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찾지 않는 비밀 공간이다.

“자, 너만을 위한 공간이야. 마음껏 발자국 만들어.”

“비켜. 갈 거야.”

“안돼. 오늘은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너 아무 데도 못 가.”

“네가 뭔데?”

그가 나를 빤히 본다. 한 걸음 앞으로 온다. 다시 반걸음 또다시 반걸음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다. 낯선 이 순간이 떨리도록 기다리던 순간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밀어야 한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팔을 그의 가슴에 대고, 조금씩 힘을 준다. 밀릴 것이다. 밀려야 한다. 그런데 밀리지 않는다.



나는 오늘은 기필코 그녀에게 고백하고, 답을 들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정한 D-day니까 을도 갑도 없다. 그냥 그녀와 나, 우리만 있을 뿐이다. 여전히 그녀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이제부터 알려주면 되니까.

“눈 감아.”

“왜?”

“감기 싫어?”

“아니, 왜?”

“상관없어.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급하거든.”

“뭐…….”

사실 답은 이미 들었다. 14년 전 크리스마스 쪽지에 그녀가 적은 것으면 충분하다. 그러니까 이제 행동하고, 붙들면 된다. 그녀가 대는 이유는 무엇이든 내가 감당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설사 그게 죽음이라도.

그녀의 입술은 술기운에 빌린 도둑 키스 때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달콤하고, 달큼하다. 오늘은 술기운도 없는데, 취한다. 나를 밀어대던 두 손이 내 옷을 꽉 쥐고 놓지 않는다. 살짝 멀어지는 허리를 잡아 내 쪽으로 당긴다. 도망가는 얼굴을 잡고서 더 깊게 그녀를 옭아매어 본다. 역시 밀어내지 못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되었다.

[크리스마스 때 말해줄게. 우리 이모가 한 거짓말. 그러니까 나 계속 좋아해 줘]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겨우 생각해 냈다.


이모와 엄마가 싸웠다. 이모는 가끔 화가 나면 하면 안 되는 말을 종종 하는데, 하필 그걸 그녀가 들었다며 엄마가 발을 동동 굴렀던 그날과 쪽지에 적힌 진심을.


표지.jpg 처음 그린 건 돌림판처럼 나와서 약간 4컷 만화처럼 그렸다.
실험적 작품으로 문단을 기준으로 시점이 바뀝니다.
그와 그녀의 시점으로 바꾼 이유는
최근 연습 중인 현재 시제를 적용하기에
긴 글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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