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기념 글짓기
길을 가던 은이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뭔가를 하고 있다. 은이는 내 딸이지만,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간혹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드는가 하면 어떤 날은 무엇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대답은 하지 않고, 너무 슬프다고 고작 4살밖에 안된 아이가 가슴이 아프다며 울어대다 실신한 적도 있다. 소아 상담 선생님은 은이는 아무 이상 없는 보통의 아이라고 했다. 단지 감수성이 좀 뛰어나고 상상력이 좋은 것 같다는 칭찬인지 모를 말만 할 뿐이었다.
“은이야, 뭐 해?”
나는 은이 옆에 은이와 같은 모양새로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은이는 작은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엄마, 조용히 해야 해. 얘네들이 놀랄지도 몰라.”
“얘네들?”
은이의 조언대로 작은 목소리로 귀에 속삭이며 물었다. 은이는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그들을 돕고 있었다. 은이가 가리킨 건 개미떼였다. 겨울에는 거의 보지 못하는 개미떼가 길 위를 줄 서서 걷고 있었다. 은이는 개미 떼가 가기 편하게 앞에 있는 큰 장애물을 치우고 있었다. 개미 떼가 가고 있는 방향에는 죽은 벌레가 있었고, 이미 벌레를 감싸고 있는 개미떼로 내가 보기엔 징그럽기만 했다. 한참 개미 떼를 보던 은이가 일어나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가자. 엄마. 이제 됐어.”
“겨울에 개미 떼는 처음 보네.”
“눈이 안 오니까 개미들이 겨울인 줄 몰라서 그래.”
“하긴 눈이 안 온 지 꽤 됐지.”
무심코 답을 하다 은이의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은이야, 방금 뭐라고 했어?”
“응?”
너무 맑고 순진한 얼굴에 대고 다시 물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뭔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개미 떼를 도와주었다는 뿌듯한 때문이라 짐작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치원 앞에 다 달았을 때 갑자기 은이가 뒤돌아 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은이야? 어디가?”
“위험해. 엄마, 친구들이 위험해.”
은이가 뛰어간 곳에 개미 떼가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개미떼를 발견하고 개미집에 해충제를 뿌렸기 때문이다. 은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다. 은이가 개미떼를 위해 노력한 걸 아는 나도 마음이 아팠다. 뭐라 변명해주고 싶었지만, 4살 은이가 이해는 할지 더 걱정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유독 깜깜한 새벽 2시 30분인데, 유독 은이 방만 밝았다. 엄마의 본능일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나는 급히 남편을 깨워 은이 방에 뛰어갔다. 잠겼을 리 없는 은이의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남편은 온몸으로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몇 번에 반복 동작으로 겨우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그 바람에 방안을 가득 채운 차가운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은이야? 은이야?”
나는 은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방안에 발을 내디뎠다. 은이의 방에 발을 넣자 차갑다 못해 아려왔다. 마치 얼음 위에 맨발로 서 있는 느낌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이 방은 이미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려있었다. 나는 더 은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발이 빨갛게 얼어붙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은이를 찾아 둘러봤다. 그런데 겨우 찾은 은이는 창문에 아스라이 서 있었다. 은이 방에 해둔 방범창은 보이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20층 아래로 떨어질 듯 은이의 몸은 이미 창 밖에 나가 있었다.
“은이야? 은이야, 가만히 있어. 엄마가 갈게.”
은이가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작은 얼굴이 나와 남편 쪽으로 돌아왔다. 까만 은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눈썹과 손눈썹도 모두 하얗다. 은이지만, 은이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은이라는 것에는 변함없다. 엄마가 자식을 모를 리 없으니까. 천천히 은이 곁으로 다가갔다. 아니 가고 싶었다. 그러나 발부터 얼어버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마음만 갈 뿐 몸은 문 앞에서 전혀 나아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거기 있어요. 제가 갈게요.”
은이가 태어난 이후, 내게 높임말을 한 적이 없다. 생전 처음 듣는 높임말에 눈물이 난다.
“은이?”
“저는 은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은이겠죠. 저는 겨울이에요. 제가 제 자리에 있어야 눈이 오고, 겨울에도 사람들이 따뜻함을 알 수 있어요. 저는 겨울이면서 따뜻함이니까요. 내일은 크리스마스예요. 더 이상 미루면 세상은 점점 따뜻함을 모를 거예요. 부디 저를 보내줄래요? 엄마?”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은이는 아니 겨울은 자기 몸의 10배는 넘는 커다랗고 눈부시게 하얀 날개를 펼치고 내 품으로 들어왔다. 품 안에 들어온 겨울은 날개를 접고, 예전의 은이로 돌아와 나를 안아주었다. 남편은 나와 은이를 안고, 보내주기 싫다는 듯이 은이 옷을 잡았다. 그러나 은이는 아주 따뜻한 눈이 되어 창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빈방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에 눈이 펑펑 오는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