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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깰 그릇을 만들어주세요

[문향] 동아리 모임_키워드 : 용기

by 그래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얇고, 견고한 그릇을 만드는 장인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릇을 만들었고,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흙과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만든 건 무엇이든 가마에 구워주었다. 그때마다 가마 앞에서 불을 보면서 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불을 잘 다뤄야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 수 있다고 늘 말하셨다.


할아버지의 전매특허 그릇은 종이보다 더 얇은 두께로 빚은 것으로 유리보다 단단하나 흙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이 되어 어느 거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빛을 비추면 은은한 노을이 되어 아기들의 모빌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스치듯 부딪히는 소리는 종과 같고, 무엇을 담아도 손색이 없는 그릇이다. 항상 도전을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주문도 받으셨다.


“오늘은 무엇을 만드시는 거예요?”

“깰 그릇을 만든다.”

“깰 그릇?”


오늘 어떤 중년의 여성이 공방에 들어와 깰 그릇을 만들어 달라며, 원하는 그릇을 말했다. 암 환자 말기인 그녀는 할아버지를 TV에서 보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전 재산을 현금화했다고 했다.


“아주 예쁘고 고운 그릇을 만들어주세요. 수는 금액에 맞춰서 알아서 해주시고, 대신 저는 지금 종이 한 장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어요. 그런 저라도 깰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주세요. 가볍지만, 깨졌을 때 깨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견고함으로 제가 그릇을 깼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세요.”


중년 여자는 이미 머리카락 한 올 없없고, 퍼석한 피부, 힘없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며, 할아버지는 그녀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 들었다고 슬퍼하셨다. 그녀의 주문서는 기한이 없지만, 촉박하다는 것은 한걸음 걷는 것조차 혼자 하지 못하는 그녀의 걸음 때문에 알 수 있었단다.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공방에서 49시간을 함께 했다. 중간에 쪽잠을 잘 때도 할아버지는 깨어서 샘플 그릇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만 하루가 지나 할아버지의 전매특허 종이처럼 얇은 그릇이 더 얇은 형태로 나왔다. 흙이 주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릇의 크기는 일반 그릇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저울에 올라가도 추가 움직이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총 20개의 다양한 그릇을 만든 할아버지는 가마 앞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맨 눈으로 보지 못하는 뜨거운 화마를 견디며, 그녀의 그릇이 제대로 나오길 기다렸다.


49시간이 되어 가마에서 나온 그릇은 영롱하게 빛이 났다. 빛을 통과하고, 바람도 담길 만큼 아름다운 그릇은 잠시 후 가마 앞에 작은 공터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중년 여자는 모든 그릇이 깨졌을 때, 비로소 웃었다.



그녀가 이 공방을 찾은 이유는 TV에서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광고 문구 때문이었다.


『만약 나를 깰 수 없다면 그릇을 깨 세요. 괜찮아요. 그릇은 원래 한 톨의 흙이었으니, 미안해할 것 없어요. 당신이 깰 그릇을 위해서 제가 정말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어 드릴게요. 당신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20251127_깰 그릇을 만들어 주세요..jpg 저는 용기의 뜻 중 그릇으로 키워드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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