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장소

2025년 09월 15일 월요일 [정적]

by 그래

“할머니, 저 왔어요.”

“도원이 왔니? 아픈 덴 없어?”

“없어요. 아픈 건 할머니이시잖아요.”

“내 나이 90이다. 아픈 게 당연한 거야.”

“전 할머니 밖에 없는데, 아프지 마세요.”

“오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도원은 새벽까지 할머니 옆에서 할머니 손을 잡아주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다음날 할머니는 일어나 도원과 함께 방을 정리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넓게 보이던 방이 꽤 작아진 느낌이다. 만수를 알기 전이었다면 좀 더 큰 방을 원했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익숙한 공간이 좋다는 것을 말이다.


같은 고요 속에 방인데도 본가에 있을 때와 달리 할머니 방에서 고요는 평안하다. 커다란 할머니 저택에서 도원이 모르는 공간은 없다. 만수가 오기 전엔 도원만의 아지트였고, 만수가 오고 나서는 만수와 둘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이 공간에는 만수와 만든 작품이 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쓰레기의 종합예술 같다. 깡통을 엮은 기다란 줄에서 고요 속의 외침은 청량하기보다는 둔탁하고 소리만 나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배는 이미 낡을 때로 낡아 손만 대도 으스러질 것만 같다. 종이배와 비행기는 접힌 부분인 나풀거리는 것이 손을 대는 건 사치일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떠나기 전 그대로다. 이제 도원이 왔으니, 만수만 오면 완성되는 그림 속에 도원이 혼자 앉았다. 이젠 작디작은 의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만수와 놀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만수가 알려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는 참 재밌었다. 둘이 있어도 온종일 지루하지 않았고, 간지러움을 못 참는 만수는 콧등에 머리카락만 있어도 콧등을 씰룩거리다 이내 움직였다. 움직임이 적은 도원을 요리조리 지켜보다 귓불에 바람을 훅 불던 만수는 그 바람에 움직인 도원이 씩씩 대어도 자기 잘못 아니라며 웃어 댔다. 반칙과 장난과 웃음이 난무하던 게임은 그것만 있지 않았다.


한 번은 못 쓰는 종이 있냐는 질문에 할머니가 보고 쌓아둔 신문지를 가져온 적이 있다. 그날 ‘딱지’라는 것을 처음 만들어봤다. 가져온 신문지가 일주일치나 되었는데, 만수가 알려준 여러 가지 모양에 딱지를 만들었더니 금세 동이 났다. 그래서 할머니가 보고 있던 신문까지 가져와 딱지를 접었다. 신나게 놀다 신문을 찾던 할머니에게 들켜 둘이 나란히 꿀밤을 맞은 적도 있다. 게다가 만수는 공기놀이를 아주 잘했다.

만수의 손은 굵었지만 작았다. 공깃돌 5개를 손바닥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멀리 떨어진 두, 세 개의 공기를 순식간에 쓸어 잡으면 보는 내내 신기하기만 했다. 도원은 슬쩍 만수와 만든 돌멩이 공기를 꺼내 바닥에 뿌렸다. 순식간에 조용한 방안에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둔탁하게 흘렸다.

그때는 익숙해서 이 소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하긴 둘만의 아지트는 원래 갱도를 만들기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입구를 만들고, 계획이 무산돼 동굴처럼 흉물스럽게 남은 걸 할머니가 김치 등을 저장하려 수리했다고 했다. 그런데 도원이 이 공간이 좋다고 달라고 한 것이다. 할머니는 흔쾌히 허락했다. 만수는 처음 이 공간에 왔을 때 울리는 소리가 좋다면 몇 번에나 도원의 이름을 불렀다. 공간의 울림으로 들리던 자기 이름에 도원도 만수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며칠은 그 소리가 좋아 몇 번이고 해댔다.


만수가 없는 이 공간은 어떠한 소리도 없다. 만수가 두고 간 흔적들을 움직일 때마다 만수가 있던 그때처럼 같은 소음을 내지만, 여전히 없는 만수로 인해 벌어진 틈이 이제는 싫다. 처음엔 그저 완전한 조용함을 주는 것처럼 느껴져 좋던 공간이었다. 이제는 이 고요함이 익숙해졌는데, 이곳은 이 고요가 없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더 그립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내일이면 다시 이곳도 익숙한 소음이 있을 터다.


이전 15화가족이나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