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영화 <페드로 파라모> 2024년

by 노용헌

주인공이 후안 쁘레시아도라고 하지만,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 어머니 돌로레스, 뻬드로 빠라모의 진짜 사랑인 수사나, 렌떼리아 신부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흘러가기도 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생전에 겪은 이야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도로떼아, 근친상간 남매, 뻬드로 빠라모의 또 다른 사생아 미겔 빠라모등 인생이란 건 평범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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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내가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겠다는 뜻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드리자, 당신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했다. “꼭 찾아가야 한다. 그 양반도 너를 보면 좋아할 게다.” 나는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당신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두 손을 빼낸 후에도 한참 동안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귀가 닳도록 되뇌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요구해라. 그 인간은 나에게 당연히 갚아야 할 것을 하나도 갚지 않았어. 얘야, 그런 인간은 우리를 버렸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돼.

-- 알았어요, 어머니. (P7)


우리 인간은 다들 죽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죽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 죽고 사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이거든. 만일 내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자네가 부탁해 보게 목숨을 끊어 달라고.....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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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전에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거기선 내 말이 더 잘 들릴 거다. 얘야, 이 어미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게다. 나중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는 너도 알게 되겠지. 죽은 어미의 말보다 어미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소리가 훨씬 더 잘 들린다는 것을.” 어머니.... 그래서 당신의 음성이 생생히 살아 있군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 제게 말씀하신 곳은 이런 곳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잘못 일러주셨던 겁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디란 말인가요? 여기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고요.’

나는 강물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이 아니었다. 나의 손가락은 마치 바람이 열어놓은 듯한 허공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 여인이 서 있었다.

-- 들어와요.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P21)


“..... 이삭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솟았다가 가라앉는 지평선과 겹겹이 굴곡을 이루며 출렁이는 오후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아라. 흙 내음. 그리고 밀과 알팔파 내음. 온통 달콤한 꿀 향기로 가득한 마을......”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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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저 구름 위에,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너는 숨어 있어, 수사나. 하느님의 거대한 공간에, 당신의 섭리 뒤에, 결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너는 숨어 있어. 나의 간절한 소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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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가 끌고 있는 수레 행렬을 보았다.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며 천천히 자갈길을 구르는데, 사람들은 마치 잠든 것 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 새벽은 온통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로 가득 찬단다. 초석이며, 옥수수며, 수수깡이며, 도처에서 짐들을 싣고 오는 소달구지 소리로 말이다. 사람들은 창문을 뒤흔드는 수레바퀴 소리에 잠이 깨고, 마을에는 장작불 이에서 갓 구워낸 빵 냄새가 진동하는데, 저만치 아침 하늘이 열리는 거야. 하지만 어떤 날은 달라. 느닷없이 천둥 소리가 들리면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거든. 봄이 온 거야. 얘야, 너도 거기 있다 보면 ‘느닷없다’는 말에 익숙해질 게다.”

빈 수레들이 거리의 정적을 깨뜨리며 어둠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이 남긴 메아리.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저기 저 위, 어둠이 웅크린 저 언덕 사이로 거슬러 가다 보면, 내가 왔던 길이 나올 것 같았다. (P65)


“잠자리가 있으면 뭘 해. 자신의 영혼이 함께하지 못하는 걸.”

끊임없이 누군가의 독백이나 노랫소리가 들리고, 심지어 지금 어디있느냐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후안. 이제 독자는 그가 죽음의 세계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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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없었다. 나는 폐부에서 목구멍을 통해 입으로 빠져나오는 목구멍을 통해 입으로 빠져나오는 공기를 두 손으로 감싸서 그 공기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들이마셔야 했다. 그러나 공기가 입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느낌뿐이었고, 나중에는 그 느낌조차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잠시도 머물지 못한 채 영원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원히. (P81)


나는 죽을 날만 기다렸어. 그런데 자네를 만난 걸세. 나는 자네를 보는 순간, 이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지. 고단한 육신이 쉴 때가 된 거라고, 돌이켜보면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땅 한 평 차지한 적도 없었어.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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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날씨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겠지요.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이 청아한 빛과 싱싱한 새순 향기로 가득하다고.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몰려드는 구름의 색깔이 어떻게 바뀌는지, 구름이 어떻게 비를 만들며, 그 비가 어떻게 대지에 떨어지는지... 어머니는 어린 시절과 꽃같은 청춘을 이 마을에서 보냈지만 당신의 고향을 다시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고, 나중에야 당신의 자식을 고향으로 보냈던 겁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도 못 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요? 도로떼아 아주머니, 하늘에는 우리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그런 구름들이 떠 있을까요?

-- 나는 모르는 일이야. 후안 쁘레시아도. 고개를 숙이고 산 지가 하도 오래되어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어. 설사 고개를 들었다고 해도 무슨 마음으로 쳐다봤겠나? 하늘이 너무 높기도 했지만, 숨을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렌떼리아 신부님이 그러시더군. 평생 영광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게 될 거라고. 아예 생각조차 못할 거라고.... 모든 게 나의 죄업탓이지. 하지만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야 했어. 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힘든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두 발을 바지런히 놀리면서 사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문마저 닫혀버리면 남는 것은 오로지 지옥뿐이니,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여보게, 후안 쁘레시아도, 나에게 하늘이란 지금 내가 묻혀 있는 이곳일세.

-- 아주머니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요?

-- 여느 영혼들처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자들을 찾아 떠돌고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미움을 샀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젠 그런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뭔지도 모르는 양심의 가책을 찾다가 지칠 대로 지쳤거든. 나는 끼니도 거른 채 괴로워했지. 내게 쏟아지던 욕설과 저주를 송두리째 감수했던 기억 때문에 밤새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어. 그러면 됐지. 이제 뭘 더.... 죽는 날을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는데, 내 영혼이 간청하더구먼. 일어나라고. 질질 끌려 다닐망정 억척스럽게 살라고. 순간 나의 죄업을 씻어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지. 하지만 이미 삶을 포기했던 나는 “모든 것은 여기서 끝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런 삶을 끌고 갈 힘이 없어.”라고 말한 뒤에 입을 열어주었지. 나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 나는 느꼈어.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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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았어. 차라리 그게 나았는지도 몰라. 죽음이란 사물이 하나인 것처럼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니까. 슬픔이란 어느 누구도 함께 찾아 나서는 게 아니니까. (P108)


나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당신을 체념하고자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당신이 원하던 바였으니까. 그런데 그날 아침은 즐거웠던 것일까? 그날 아침에는 덩굴나무 이정표를 부수고 열린 문으로 들이닥치던 바람이 있었어. (P118)

-- 우리가 무기를 든 것은 썩은 정부나 당신 같은 인간들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오. 정부나 당신네들은 우리를 등쳐먹고 사는 사기꾼이자 피를 빠는 기생충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소. 물론 도지사 같은 작자에겐 긴말 필요 없이 이 총알이 대신할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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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드로 빠라모는 그녀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신에 의해 그녀가 누구보다 끔찍하게 사랑받는 여자임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지울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키는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사나 산 후안의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뻬드로 빠라모가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였다. (P145)


순간 그는 혼자서 쓸쓸하게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 위 높여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꾸까, 그녀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잠자리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던 여자였다. 시력이 좋지 않고 몸에 냉기가 흐르는 체질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기에, 아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름조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을 나을 수 없었다. 왕진을 다녀가는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나귀까지 팔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꾸까, 그녀는 찬 이슬을 맞으며 차디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오는 햇살도, 상큼한 아침 바람도,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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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드로 빠라모는 그녀의 팔에 기댄 채 몸을 움직이려고 기를 썼지만,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토해 내지 못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땅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무더기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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