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년
단편 소설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제목만 같다. 1996년에 개봉한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홍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홍상수 감독의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인간 심리적 측면에서 잘 다루는 작가이다. 영화는 소설가 구효서의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다르다. 3억 5천만 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으며, 로카르노 영화제(The Locarn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용호상, 로테르담 영화제(International Film Festival Rotterdam) 타이거상 등을 수상하였다.
여름에 너드 가족이 애디론댁스에 있는 화이트비치 별장에 모일 때면 그들 중 하나가 어느 날 밤 꼭 이렇게 묻곤 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기억 나?” 그러면 마치 육중주의 오프닝 선율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자기네가 잘 아는 파트를 맡기 위해 길버트 앤드 설리번의 오페라를 부르는 가족들인 양 몰려들고, 그 뒤로 한 시간 남짓 리사이틀이 벌어졌다. 그 완벽한 나날들 --그런데 그런 날이 수백 일은 되었다--은 전에 한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는 듯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듯했고, 그들은 마치 그것이 여름의 내력이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재난들의 연대기를 되짚어보곤 했다.
그 유명한 돼지는 랜디 너드의 것이었다. 랜디는 그 돼지를 랜체스터 박람회에서 상품으로 타왔는데, 그 돼지에게 우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파멜라 블레스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그는 그 돼지를 연장 창고에 집어넣고 낡은 캐딜락을 몰아 블레스델의 집으로 향했다. (P117-118)
그 와중에 그날 돼지가 우물에 빠졌는데, 그 가족의 일원이 아닌 다른 주인공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러셀 영이었다. 러셀의 아버지는 머캐빗에 철물점을 소유하고 있었고, 영 가족은 평이 좋은 본토박이 집안이었다. 영 부인은 해마다 봄이면 청소부로 한달간 일을 하면서 여름 별장을 개장하지만 그녀의 처지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러셀은 너드 가족을 두 명의 사내아이 --하틀리와 랜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들의 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너드 씨의 두 아들보다 한두 살 더 위여서 너드 부인은 어떻게 본다면 자기의 아들들을 그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러셀은 에스더 너드와는 동갑이고 조앤보다는 한 살이 어렸다. 그들의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했을 때 에스더 너드는 아주 뚱뚱한 계집아이였다. 조앤은 예쁜 값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냈고, 에스더와 조앤은 랜디를 몹시 좋아해서 그 아이가 제 보트에 붙일 그림을 사도록 자기들의 용돈에서 일부를 떼어주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는 사내아이 계집아이 사이에 별다른 친밀한 접촉은 없었다. (P119)
돼지가 우물에 빠진 여름은 또한 에스더가 테니스에 매진한 여름이자 그녀가 아주 날씬해진 여름이기도 했다. 에스더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굉장히 뚱뚱했지만 1학년 내내 새로운 외모와 새로운 성품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그래서 그녀의 경우에는 성공을 거둔--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엄격한 다이어트를 계속했고 하루에 열두 세트에서 열네 세트씩 테니스를 쳤는데, 그녀의 간명하고, 운동선수 같고, 진지한 태도는 절대로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러셀은 그해 여름 그녀의 테니스 파트너였다. 그해 여름에도 너드 부인은 러셀에게 다시 일자리를 주었지만, 그는 주어진 일을 사양하고 대신 낙농장 농부 일을 하면서 우유를 배달했다. 너드 씨 부부는 그가 독립하기를 원하나보다 하는 생각으로 너그러이 이해했다. 두 사람 모두 우선 러셀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가 2학년을 마치면서 우등생 명부에 올랐을 때에도 그들은 마치 그것이 자기네 집안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낙농장 농부라는 일자리가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러셀은 아침 열시에 자기 우유 배달 구역을 다 돌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에스더와 테니스를 치면서 보냈으니까. 그는 종종 늦게 까지 남아 있다가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그날 오후 그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을 때 요리사인 노라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면서 돼지가 연장 창고에서 도망쳐 나와 우물에 빠졌다고 소리쳤다. 누군가가 우물이 들어 있는 헛간 문을 열어놓아둔 것이었다. 러셀과 에스더는 우물로 달려갔다가 돼지가 이 미터 정도 깊이의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러셀이 빨랫줄로 풀매듭을 만들어 돼지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P121-122)
다음에는 누군가가 하늘빛에 대해 말하면 너드 부인은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저녁 하늘이 얼마나 빨갰는지를 회상하곤 했다.
“그날 너는 에스더와 함께 테니스를 치고 있었어. 그렇지 않니, 러셀? 그해 여름은 에스더가 테니스만 치던 여름이었지. 너는 박람회에서 돼지를 상으로 타왔었고, 그렇지, 랜디? 네가 야구공을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그런 게임에서 우승을 해 타온 것이었지. 넌 늘 그렇게 뛰어난 운동선수였어.”
그들은 모두 그 돼지가 래플에서 당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설명이 살짝 바뀐 것을 고치려고 들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랜디가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남다른 점들을 칭찬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면 그녀는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종종 그가 독일어를 얼마나 잘했는지, 기숙학교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축구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회상하곤 했는데 --그 모두가 랜디를 겨냥한 듯 보이는, 마치 그러는 것이 그의 기운을 북돋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잘못되었으되 고운 마음씨에서 나온 기억들이었다. “너는 그 돼지를 넣을 우리를 만들려고 했었지.” 그녀가 말했다. “넌 언제나 그렇게 뛰어난 목수였어. 네가 만든 그 책장 기억하니? 그때 파멜라가 전화하는 바람에 넌 낡은 캐딜락을 몰고 거기로 간 거였고.” (P131-132)
전쟁이 끝나자, 너드 가족은 여름을 지내기 위해 화이트비치 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너드 부인은 적십자에서 활동했고, 너드 씨는 병원에서 잡역부로, 랜디는 조지아에서 취사 장교로 있었고, 에스더의 남편은 유럽에서 분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조앤은 적십자와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갔었지만 상급자와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얼마 안 가 군대 수송선으로 귀향 조치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대부분의 다른 기억들에 비해 덜 지속적이어서 하틀리의 죽음을 빼놓고는(하틀리는 태평양에서 익사했다) 쉽게 잊혀졌다. 이제 일요일마다 아침 일찍 요리사와 가정부를 데리고 성 요한 교회로 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은 랜디의 몫이었다. 그들은 열한시에 테니스를 치고 오후 세시에 수영을 하고, 여섯시에는 진을 마셨다. 그리고 ‘아이들’ --하틀리와 러셀을 뺀--은 셰릴 폭포를 보러 가고, 머캐빗 산을 오르고, 베이츠 연못에서 낚시를 하고, 맨발로 낡은 캐딜락을 몰아 초원을 가로질렀다. (P145-146)
하틀리를 위한 기도문은 그가 익사한 지 삼 년이 지나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무더운 날에 낭독되었다. 비교적 간단한 추도사에 이어 전도 목사가 바다에서 사망한 것과 관련된 시구 하나를 덧붙였다. 너드 부인은 그 기도문 낭독에서 어떠한 위안도 받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하느님의 권세에 대한 믿음이 저녁 별의 마법에 대한 믿음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녀가 그 예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추도식이 끝나자, 너드 씨가 그녀의 팔을 잡았고 노부부는 제의실로 향했다. 너드 부인은 러셀이 교회 밖에서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하틀리여야 했을까? 어째서 러셀이 아니고?
그녀는 여러 해 동안 그를 보지 못했었다. 그는 체격에 비해 너무 작은 양복을 입었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가 되기 바랐던 부끄러움에(그녀는 악의나 반감을 느꼈을 때는 언제나 서둘러 사랑으로 그것을 덮어버리려 했기 때문에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 중에서 그녀가 가장 따뜻한 아량을 보인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조바심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러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오, 이렇게 와주다니 정말 고맙구나. 넌 그애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하나였으니까. 네가 보고 싶었단다. 러셀. 우리 있는 데로 좀 건너와. 내일 올 수 있겠니? 우리는 토요일에 떠날 건데 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러면 다시 옛날 같아질 거야. 저녁 먹으러 와라. 올해에는 가정부가 없어서 마이라와 아이들에게는 오란 말을 못하겠다만, 너를 보고 싶으니, 꼭 와라.” 러셀은 그러겠다고 했다. (P147-148)
여름이 막바지라서 날도 금세 저물어 한순간은 환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곧바로 어두어졌다. 머캐빗과 그 산등성이는 저녁놀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고 그래서 한동안은 그 산 너머에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것, 거기서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 보였다. 순수한 놋쇠 빛깔의 빛의 장막이 무한의 공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별들이 나타나고 땅은 아래쪽으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심연의 환영은 사라졌다. 너드 부인은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그 시간과 장소가 이상하리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것은 모조품이 아니야. 그녀는 생각했다. 또 관습의 산물도 아니고, 여기는 내 아이들이 최고의 시절들을 보낸 오직 하나뿐인 장소이고 하나뿐인 공간이야.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잘 살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녀는 다시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좁혀 뜨자 눈가에 눈물이 배어났다. 무엇이 여름을 항상 섬이 되게 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이 여름을 그토록 작은 섬으로 만들었을까? 그들은 무슨 실수를 했을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들은 이웃을 사랑했고 겸손의 미덕을 존중했으며 이익보다 명예를 지켰다. 그런데 그들의 능력과 자유와 위대함을 잃어버린 곳은 어디였을까? 어째서 그녀 주위에 있는 이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것이었을까?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기억하니?” 그녀가 물었다. 하늘은 빛을 잃었고 시커먼 산들 아래에 있는 호수는 험악하고 치명적인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너는 에스더하고 같이 테니스를 치지 않았니, 러셀? 그 여름은 에스더가 테니스에 빠졌던 여름이었어. 그리고 넌 랜체스터 박람회에서 그 돼지를 상으로 타왔었고, 그렇지 않니, 랜디? 넌 야구공을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그런 게임들 중 하나에서 그 돼지를 상으로 탔었지. 넌 언제나 대단히 훌륭한 운동선수였어.”
그들은 모두 점잖게 자기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에 빠진 돼지와 갈매기 바위섬의 보트, 창문에 걸려 있던 마사 이모의 코르셋, 구름 속의 불, 그리고 거센 북서풍을 떠올리면서.
(..중략..)
그 이야기가 너드 부인의 기분을 다시 북돋워주고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어 모두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바깥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별장이 서서히, 마치 바람이 돛을 팽팽하게 부풀렸을 때의 선체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들어있는 방은 튼튼하고 안전해 보였다. 비록 아침이면 그들 모두가 다 떠나간다 하더라도. (P155-156)
그녀의 리사이틀이 계속되는 동안 에스더와 러셀은 베란다를 떠나 들판 위쪽으로 올라가서 물에 빠져 죽은 돼지를 묻어주었다. 날씨는 싸늘했고 러셀이 무덤을 파는 동안 에스더는 랜턴을 들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그는 머캐빗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녀는 결코 그곳에서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들이 베란다로 돌아왔을 때 쿨리지 양은 그녀의 마지막 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다음에 러셀이 떠났고 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그 이야기가 너드 부인의 기분을 다시 북돋워주고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어 모두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너드 씨가 불을 피우고 조앤과 체커 게임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너드 부인이 그들에게 오래된 캔디 상자를 하나 건넸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별장이 서서히, 마치 바람이 돛을 팽팽하게 부풀렸을 때의 선체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들어 있는 방은 튼튼하고 안전해 보였다. 비록 아침이면 그들 모두가 다 떠나간다 하더라도.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