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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9장 멈추면 보인다]

by 노용헌

持而盈之 不如其已 (지이영지 불여기이)

而銳之 不可常保 (이예지 불가상보)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옥만당 막지능수)

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成名遂身退 天之道 (공성명수신퇴 천지도)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을 이루면 몸소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成名遂身退, 天之道)라는 구절이 있다. 달리 말하면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다 갖고 있던 것을 잃을 수 있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는 경고이다.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서 유래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그 맥을 같이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으며, 적당한 것이 최선이다. 인간의 욕심은 멈추질 않고, 그 욕심(욕망)의 늪에서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본다(seeing)→바라본다(looking)→응시(gaze)→관조(觀照)→명상(默想, meditation)

듣다(hearing)→귀를 기울이다(listening)→이해(understand)→판단(判斷)


“그 타자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응시’가 가능해진다.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를 그 뒤에서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라캉)


라캉에게 있어서 ‘응시’란 무엇인가? 주체는 세계를 보는 동시에 세계에서 보이는 존재이다. 보는 존재로서 보임에 대한 의식이 응시이다. 세계는 우리를 둘러싸고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나는 단지 한 지점에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를 응시(regard)라고 했다. 라캉은 장자의 유명한 호접몽(胡蝶夢)에서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되어 본 것들, 주체가 나비가 되어, 그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나비를 본다고 말한다.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는 욕망을 바탕으로 한 주체이다. 예술작품은 욕망을 바탕으로 응시를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그것이 주체의 욕망이든, 객체의 욕망이든, 상상속의 제 삼자의 욕망이든 간에. 욕망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의 응시는 단지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응시를 통해 욕망을 객관화하고, 욕망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극히 적은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단 한 사람, 더 이상은 기대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 또는 한 사람을 위해서, 나는 결국 말할 것이다, 다른 미디어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사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운다, 그 다음 당신은 이미 말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것이다. 사진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계를 깨달아라. 형태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 예술가는, 그가 그의 최초의 감정을 국한해야 하는 범위 안에서, 창조적인 것을 할 수 없었다. 사진가는 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의 카메라 사이즈에 의해 제한되고, 그의 렌즈의 초점거리, 건판이나 필름의 정도, 그리고 사용하고 있던 프린팅 과정들: 이 한계 내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고, 그 이상은 어느 정도까지 만이다 — 왜냐하면 사진은 시작한지 얼마 안 된다.”

-Photography—Not Pictorial, Edward Weston, Camera Craft, Vol. 37, No. 7, pp. 313-20, 1930-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의 글에서처럼, 그는 사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진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계를 깨닫는 것은 사진의 특성을 잘 이해해야만 사진적으로 표현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진은 그 특성상 카메라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순간적으로 기록되는 예술이다. 따라서 사진의 모든 과정, 노출, 현상, 인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되는 사진적 표현을 미리 계획하고 구성하는 사진적으로 바라보는 것, 사진적인 시각의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사진적으로 바라본다-

에드워드 웨스턴.jpg

우리는 눈으로 보고, 카메라로 촬영한다. 카메라는 눈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눈이 보지 못한 것들을 카메라가 본다. 사진적 시각이란 무엇일까?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의 회화적 사진의 경향들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사진분리파(Photo Secession)운동으로 새로운 사진적 시각으로 전환을 꾀했고, 이어 뉴비전(New Vision)으로 이어졌다. 카메라가 가지는 속성의 이해와 함께 새로운 눈으로 본다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결국 본다는 것은 귀로 들리는 것들, 만질 수 있는 촉감 등의 종합적인 예술가의 감정(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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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의 음반중 2011년 발매된 <Christmas>의 ‘Whte Christmas’ 곡은 1942년 어빙 벌린의 곡을 리메이크했고, 영화 <스윙 호텔(Irving Berlin’s Holiday Inn)>에 사용되어 잘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곡 ‘Come Fly With Me’도 1958년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인데 부블레의 스타일로 편곡되었다. ‘Feeling good’은 니나 시모네의 원곡을 남성적인 스타일로 표현한 스윙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의 엔딩곡으로 나오는데,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의 눈빛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면서 매우 인상적이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감정(feeling)은 코모레비(こもれび, 木洩れ日, Komorebi)의 순간이다.


Michael Buble-feeling good

https://youtu.be/Bn4lxodunWM?si=qYmNE7H2m9RX93z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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