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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by 노용헌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불득 명왈미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其上不曒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是謂惚恍 (시위홀황)

迎之 不見其首 隨之 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영지 불견기수 수지 불견기후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能知古始 是謂道紀 (능지고시 시위도기)


이희미(夷希微).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미(微)는 연관성이 있는 단어이지만, 이(夷)와 희(希)는 단어의 뜻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세 단어는 하나로 결합되어진다는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이희미(夷希微)는 과연 무엇일까? 전설속의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를 말하는 것인가? 노자는 신비주의자인가? 무색(無色), 무성(無聲), 무형(無形). 무형무상(無形無狀). 모양 없는 모양, 무상지상(無狀之狀),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 무물지상(無物之象).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거꾸로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마음의 눈으로 본다. 성경 요한복음서에도 이런 말이 있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라고 한다. 그런데 보지 않고도 믿기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보고 만져봐야 느낄테니까.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 보이지만 보려 하지 않는 것(불편한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 한글로 된 글자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대학(大學)의 정심장(正心章)편에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 在正其心)” 그 존재가 감추어져 있다. 본질은 겉 외피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일반언어학강의>에 따르면, 언어는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된다. 이 용어는 기표(記標, 시니피앙·signifiant)와 기의(記意, 시니피에·signifié)로 기호학자들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같은 표현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다. ‘꽃’이라는 단어는 실제의 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꽃’이라 표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 ‘꽃’도 쓰는 사람의 입장이나 체험, 내면에 고착된 관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 상호보완적이면서도, 다층적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 의미라는 것은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었던 사실들 또한 달라질 수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개별 주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경험들과 인식에 따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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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sz)의 유명한 동그란 안경 두 개와 담배 파이프, 재떨이가 테이블에 놓여져 있는 사진이다(몬드리안의 안경과 파이프, 1926). 이 사진은 동향의 화가 라요스 티하니(Lajos Tihanyi)의 ‘파이프가 있는 정물화(1923)’에서 영감을 받아 촬영했다고 한다. 하나는 몬드리안의 안경이고, 나머지 하는 누구의 안경일까.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케르테츠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자신의 작업원칙에 충실했다. 그는 어떤 사조나 그룹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자신의 사진에 혁신적으로 작업했던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 일상속의 순간을 그의 언어로 표현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우리가 해온 것들은 모두 그가 처음으로 했던 것”이라는 말로 칭송했다.


“내 사진들은 현실보다는 꿈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 자신과 내가 보는 것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끈끈한 연계가 있다.”

“좋은 사진은 우리 눈에만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두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시각은 항상 이미지와 영혼 사이를 오간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러 나가지 않는다. 평소 항상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면서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을 때 멈춰 서서 찍는다. 종종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할 때도 있다.”

-앙드레 케르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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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알토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음악은 1940년대 당시 지배적이었던 빅밴드 중심의 스윙 재즈 트랜드로부터 벗어나 ‘비밥(Bebop)’ 스타일로 일컬어지는 모던 재즈 시대를 연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형식은 마치 새가 날갯짓하는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붙여진 별명은 ‘야드버드(Yardbird)’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곡 중에서 ‘조류학(Ornithology)’은 찰리의 별명인 ‘새(bird)’를 토대로 제목을 만든 것이다. 찰리 '새'가 들어간 제목의 앨범의 여러 장 발표했다(Yardbird Suite, Bird of Paradise). ‘조류학(Ornithology)’은 후에, 밥스 곤잘레스(Babs Gonzales)가 가사를 만들었다(https://youtu.be/1WuWD3uHACA?si=jV8A3xKmPR2sjmUx). 마약중독자였던 그는 아마도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극렬 재즈광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만든 찰리 파커의 영화 <버드>(1988)에서 그의 불행하고 외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뉴욕에서는 매년 8월에 찰리 파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파커가 죽은 지 몇십 년이 되는 지금도 그를 위한 트리뷰트 공연이나 앨범 제작, 리믹스 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재즈 초심자가 듣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다. 재즈 연주자가 듣기에는 훌륭한 음악이지만, 멜로디에 익숙한 초심자에게는 듣기에 어려울 수도 있다. 사진을 처음 할 때 듣게 되는 말이 “많이 찍으면 사진이 는다”는 말이다. 음악도 “많이 들어야 그것에 귀가 열릴 것이다.”


“Don’t play the saxophone. Let it play you.”

“색소폰을 연주하지 말라. 색소폰이 당신을 연주하게 하라.”

-찰리 파커-


찰리 파커Charlie Parker-Ornithology

https://youtu.be/toWY4j4jOOw?si=mPS_lhVDX7I8rD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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