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처음과 같이]
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萬物竝作 吾以觀復 (만물병작 오이관복)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根曰靜 是謂復命 (귀근왈정 시위복명)
復命曰常 知常曰明 (복명왈상 지상왈명)
不知常 妄作凶 (부지상 망작흉)
知常容 容乃公 (지상용 용내공)
公乃王 王乃天 (공내왕 왕내천)
天乃道 道乃久 (천내도 도내구)
沒身不殆 (몰신불태)
“귀근왈정 시위복명(歸根曰靜 是謂復命)”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靜)이라 말하니, 그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귀근은 귀소(歸巢)의 의미로, 복명은 본능(本能)의 의미로 해석하면, 귀소본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복명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복명(復命)이 국어사전으로는 ‘어떤 일의 결과를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보고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의 명(命)은 한정되어 있다. 윤회사상이 아니라면, 인간의 수명(壽命)은 정해져 있고, 다 죽게 된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가 복명이 아닐지 모르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노래한 천상병 시인의 시 제목 <귀천(歸天)>처럼 말이다. 뿌리로 돌아간다는 귀근(歸根)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자신이 자라온 곳, 자신의 근간(뿌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멀리 타향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가졌던 우리 민족처럼. 강제로 이주된 삶에서 귀근의 의미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원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갔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통해 네 가지 경향을 제시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과거로 회귀한다는 말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귀근(歸根)을 하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홉스는 강력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런 국가권력의 등장이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성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현대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한 ‘유동적(Liquid Modernity)’ 상태라고 말한다. 난민 문제, 경제적 격차, 인종차별, 정치에 대한 불신, 우파 포퓰리즘등 복잡한 현대사회에 귀근은 그래서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현대의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은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정체성의 시대’는 무의미한 온갖 소음들로 가득하다. 정체성의 추구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고립시킨다. 그러나 외롭게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애쓰는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은 그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느끼는 불안감과 근심을 함께 공유할 방법을 찾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겁먹고 불안해 하는 개인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불안감을 떨쳐버릴 예식을 거행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어벽을 설치하면 잠시나마 외로움에서 해방된다. 효과가 있든 없든 그래도 뭔가 조치를 취하긴 했다고, 적어도 그냥 손 놓고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196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뉴 다큐멘트(New Documents)’展에 참여하면서 주목을 받았지만, 그녀의 삶은 1971년, 손목을 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천착(穿鑿)했던 사진들의 주제는 장애인, 기형, 난쟁이, 거인, 성소수자, 성도착증자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에서 그녀는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회의 편견에서 이들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패션 사진을 찍었던 그녀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녀가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 주려고 했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로,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퍼Fur>(2006)가 있다.
“카메라는 나와 피사체 사이의 문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기형인들에 대한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형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이안 아버스-
재즈의 뿌리가 되는 것은 블루스(blues)일까, 소울(soul)일까. 블루스나 소울은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소울은 195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이 시작되면서 나왔다고 하니 시기적으로는 블루스의 뒤에 있다.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 도린 케첸스(Doreen Ketchens)가 부른 “House of the Rising Sun”은 미국의 전래 민요처럼 불렸었던 곡이었는데, 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리메이크된 유명한 곡이다. 애니멀스(The Animals)의 노래로 유명하다(https://youtu.be/N4bFqW_eu2I?si=_G5OkPCBXhJy67eI). 이 노래의 가사에 등장하는 해뜨는 집을 교도소나 사창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집이 위치한 곳이 뉴올리언스(New Orleans)이다. 미국의 남부 루이지애나에 있는 도시이다. 미국 남부지역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노예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목화솜을 땄던 그들의 고단한 삶이 노래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소설 <뿌리(Roots)>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블루스 이전의 노래는 아마도 흑인 영가(spirituals)일 것이다. 뉴올리언스가 흑인들의 삶, 노래가 탄생한 곳이라면 그 남부지역을 딕시로 불리 웠다. 딕시(Dixie)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때 남부연합(CSA: Confederates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한 11개 주들을 가리키며, 오늘날엔 미국 남부의 별명으로 쓰인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병사들은 〈Dixie〉라는 노래를 거의 국가처럼 불렀다. 이 노래는 1861년 2월 18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열린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의 남부연합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1859년 대니얼 에멋(Daniel Emmett)이 지은 이 노래는 〈I Wish I Was in Dixie〉 또는 〈Dixie’s Land〉라고도 한다(https://youtu.be/NpSR0oI5zy8?si=0M2ckTC_QUheMWFt). 어쨌든 블루스는 하나의 정신으로 본다면, 아마도 ‘귀소(歸巢)’일 것이다. “나 집으로 돌아가리라”.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내가 돌아갈 집, 귀소(歸巢)는 그런 집이 아닐까.
“재즈는 연주자뿐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음악입니다.
재즈는 예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합니다. 또 다른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요.
저는 제 작품도 그렇게, 은밀하지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니 모리슨-
도린 케첸스(Doreen Ketchens)의 “House of the Rising Sun”
https://youtu.be/i9w6LwiV2M8?si=VQodAsl3f_ja4t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