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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21장 있는 듯 없는 듯, 황홀의 경지]

by 노용헌

孔德之容 惟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황혜홀혜 기중유물)

沓兮冥兮 其中有精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精甚眞 其中有信 (기정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자고급금 기명불거)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然哉 以此 (이열중보 오하이지중보지상재 이차)


도지위물(道之爲物). 도는 있는 듯 없는 듯,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유황유홀(惟恍惟惚). 모호하여 그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 황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고(其中有象), 그 가운데 사물이 있고(其中有物), 그 가운데 영혼이 있고(其中有精),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其中有信). 노자는 도덕경 21장에서 도는 황홀(恍惚)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진에 참 의미를 발견했을 때, 좋은 음악을 들을 때 황홀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한 황홀한 순간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될 것이다.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황홀한 순간을 맞을까. 황홀한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인데 말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지. <봉우리>의 노래를 불렀던 김민기가 마지막 남긴 말은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할 만큼 다하고 죽는 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일까.


사진에 관한 철학이론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제시한 푼크툼(Punctum)이란 용어일 것이다. 푼크툼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뜻으로,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자극을 말한다. 이에 반해 스투디움(Studium)은 라틴어로 ‘교양’이라는 뜻으로, 사진의 의미를 해석하고, 사회맥락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스투디움은 ‘더는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을’ 해석하는데 있다. 만약 도(道)가 푼크툼이라면, 덕(德)은 스투디움일 것이다. 도는 이해할수 없는 묘한 것이라면, 덕은 사회맥락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이다. 푼크툼은 어느 순간에 이성과 논리를 깨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말하며, 이를 바르트는 라캉이 말하기도 한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했다. ‘주이상스’야말로 황홀의 다른 말일 것이다. 푼크툼은 과거의 상처와도 관련이 깊다. 강한 충격과도 같은 찌름은 결국 황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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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다이어의 <인간과 사진>에는 흑인 사진가 로이 디커라바(Roy DeCarava)의 이야기가 나온다. 1919년 할렘에서 태어난 그는 이 암스트롱과 존 콜트레인, 빌리 홀리데이, 밀트 잭슨 같은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인 재즈 연주자들의 모습들을 마치 재즈적 감성으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사진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지만, 재즈의 즉흥적 교감의 찰나, 흔들리는 변주의 소리들은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져 있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재즈 연주자처럼 말이다.

그는 “음악가를 음악가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리고 일꾼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다른 음악가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은 할렘의 사람들을 찍기 위해 진행 중이었던 더 큰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1951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지원금을 신청할 때 말했듯이, 그는 “오직 흑인 사진가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흑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해에서 나온 창의적인 표현을 원한다.”고 말했다.


“내 사진은 즉각적인 동시에 영원하다. 너무나 심오한 순간을 보여 주므로 그 순간은 영원이 된다…… 마치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사람이 달리기 시작해서, 쏘아 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것과 같다. 맨 꼭대기에서는 움직임이 없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바로 그것이 내가 기다리는 순간이다. 다른 생명력과 균형을 이루는 순간…… 모든 힘이 융합하는 순간,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그것이 영원이고…… 재즈이며…… 인생이다.”

-로이 디커라바: 존 콜트레인, 벤 웹스터 그리고 엘빈 존스 中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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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연주자들에게 악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 푼크툼(Punctum)이다. 자신이 어떻게 표현할지, 어떤 느낌인지, 정해진 박자, 선율이 아니라 즉흥적인 자신만의 연주는 결국 푼크툼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벤 웹스터(Ben Webster)는 테너 색소폰 연주가이다.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와 레스터 영(Lester Young)과 함께 ‘스윙 테너’중 한 명으로 듀크 엘링턴, 빌리 홀리데이, 조니 호지스등과 함께 많은 연주를 했다. 벤 웹스터의 연주곡 중에서 <대니 보이Danny Boy>를 들으며, 그 만의 음색으로 변주되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대니 보이>이 곡은 원래 아일랜드의 민요라고 한다. 원래 제목은 <Danny Boy>가 아니었으나 1913년 영국인인 ‘프레드릭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Danny Boy>라는 제목을 바꿔 만들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최희준의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알려져 있고, 존 매코맥, 빙 크로스비, 해리 벨라폰테, 짐 리브스, 탐 존스, 존 바에즈, 엘비스 프레슬리, 등 수많은 가수들이 자신들의 버전으로 불렀고, ‘You Raise Me Up’의 원곡이 하고,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기타연주곡도 있다(https://youtu.be/Q3dlma7ebKQ?si=-Y3zyhJBGA1CDuJd). 아리랑이 수많은 변주들이 있듯이, 재즈 또한 수많은 변주곡들이 있다.


Ben Webster - Danny Boy

https://youtu.be/pwFiLuYFiZ0?si=8orXkjOAJopG18p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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