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23장 말을 적게 하라]

by 노용헌

希言自然 故瓢風不終朝 驟雨不終日 (희연자연 고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孰爲此者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숙위차자천지 천지상불능구 이황어인호)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고종사어도차 도자동어도 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실자동어실 동어도자 도역락득지)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동어덕자 덕역락득지)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동어실자 실역락득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희언자연(希言自然). 자연(自然)은 말이 없다.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의 가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저 산은 내게 오지마라 오지마라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사실 저 산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풍(瓢風)은 부종조(不終朝)하며, 취우(驟雨)는 부종일(不終日)하다고 말이다. 회오리바람도 소나기도 언젠가는 그치지만, 저 산은 오지말라고,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언어에 집착해 시비를 걸고 그 말한 이의 본뜻을 버리면 되겠는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고, 온갖 미사여구로 다루는 것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 사회이다. 이런 불신 사회에 우리는 말을 많이 한다. 상대방에 욕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말들에 귀가 얇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불신만을 더한다.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쓴 법이다”라고 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합이며, 언어는 이러한 사실을 표현한다.”고 말했다.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의 사실이며, 언어를 넘어선 영역.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명제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 철학 <논리철학논고>에서는 언어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했고, 후기 철학 <철학적 탐구>에서는 언어의 의미를 규명하려고 했다. “언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논리철학논고>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말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가 언어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명제는 결국 자신의 논리에서 벗어 던져버리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의 언어와 논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통한 철학적 탐구가 단순한 논리적 구조를 넘어,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트겐슈타인 03.jpg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은 미국 대공황 시기 FSA(농업안정국)의 기록 작업으로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유명한 사진 “이주노동자의 어머니(Migrant Mother)” 사진일 것이다. 에반스의 사진들은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기록 작업(아카이브, 그들의 집, 마을과 상점, 표지판 등)이라면 랭의 사진은 그들(피사체)의 감정이 담겨져 있다. 이 사진에서 어머니의 얼굴은 무언가 말을 할 듯 참고 있는 모습이고, 그녀의 양 어깨에는 아이들이 기대어 뒤를 보고 있다. 도로시아 랭은 일곱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세상에 소외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며 사진을 촬영했다. 그녀의 사진에는 그녀의 세상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사진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진을 통해서 그녀의 마음도 사진에 담기게 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언어, 사진의 매력이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은 사진을 통해서 말을 한다. 사진은 침묵의 언어이다.

“카메라는 카메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도구”

-도로시아 랭-

도로시아 랭.jpg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는 <라운드 미드나잇>, <스트레이트, 노 체이서>, <에피스트로피>와 같은 곡들도 유명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제목에 넣은 곡들도 있다. <블루 몽크>, <몽크스 포인트>, <몽크스 드림>이 있다. 델로니어스 몽크는 특이한 방식으로 피아노 연주에 접근했는데 갑작스럽게 피아노를 툭하고 친다던가, 연주 도중의 극적인 적막 그리고 망설임 등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보편적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주 방식으로 재즈 평론가 필립 라킨(Philip Larkin)는 이에 대해 ‘코끼리가 피아노를 연주한다.(the elephant on the keyboard)’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은 비밥(Bebop)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음악에서의 빈 공간”. 그의 곡들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비대칭적이다. 전통적인 음악의 흐름과는 다른 점이다. 재즈는 독립 연주로 현란하게 말을 많이 하다가도 갑자기 일시적으로 멈추면서 침묵한다. 그의 곡 “I'm Confessin' (That I Love You)”에 페기 리(Peggy Lee)가 노래를 입혀 불렀다(https://youtu.be/gNmjiHvM1IA?si=JY5mubp39TrFOdWw).


“재즈는 자유다. 생각해 봐라.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봐라.”

“Don’t play everything of every time; let some things go by. What you don’t play can be more important than what you do.”

“모든 것을 매번 연주하지 말고 몇몇은 그냥 지나쳐라. 연주하지 않는 것이 연주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델로니어스 몽크-


I'm Confessin' (That I Love You)

https://youtu.be/ZZmXTGysai8?si=e-iqR0_yivSqCwb2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자가 재즈를 만나다